웃어라, 사진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파리에서 넷째 날

by 김김이

혼자 여행을 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점은 바로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소매치기를 당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며 우여곡절 사진을 찍었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니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하다. 찍는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스피드하게 찍는 사람도 있고, 예쁜 표정에 예쁜 포즈로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예전에는 예쁜 표정을 짓고 예쁜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스스로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찍히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사진 취향이 어찌 되었든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찍을 때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사진이 잘 나온다.






전날 몽생미셸 투어를 다녀온 여파로 피로가 쌓여있지만,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

한국 입국을 앞두고 PCR 검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한국에 갈 준비를 하니 시원섭섭하다.

다들 세수도 못하고 숙소 근처에 있는 PCR 검사소로 향했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벌써 줄이 꽤 길었다. 프랑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우리도 마스크를 잘 쓰고 줄을 서있는데, 앞에 마스크도 아닌 스카프로 얼굴을 둘둘 말고 있는 중년 여성이 우리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충분히 거리를 두고 있는 우리에게 더 멀리 떨어지라 손짓했다.

엄마는 마스크도 제대로 안 쓴 저 사람이 더 무섭다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맞는 말이다.


곧 PCR 검사소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가기 시작했다.

접수 기계 앞에 섰다. 그런데 도저히 어디에 무엇을 기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옆 기계를 쓰는 사람들이 여러 번 바뀔 동안 나는 접수 기계와 씨름을 하다가, 어떤 친절한 블로거가 쓴 설명글을 보고 겨우겨우 접수를 했다. 드디어 수납창구에서 우리의 대기번호를 부른다.


수납창구는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직원이 걸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리 앞의 딱딱한 표정의 직원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프랑스어의 폭격에 영어로 설명해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수납창구 직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노, 온리 프렌치.”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이 소리를 왜 안 듣나 했다. 대충 눈치로 여권과 카드를 건네고 수납을 완료했다.

여행 카페에서는 파리의 PCR 검사는 로맨틱하다느니, 부드럽다느니의 의견이 다양했지만 그냥 똑같이 아팠다.

다만 무사히 검사를 한 후에는 직원이 내게 대견하다며 굿걸이라며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나 김김쓰, 스물여섯인디….


이제 PCR 검사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증상이 없음에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숙소로 돌아가서 다시 한숨 자다 나와야겠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수 있는 생트 샤펠 성당은 과거 성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였다. 이후 왕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다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생트 샤펠 성당은 법원과 입구를 같이 쓰고 있기 때문에 짐 검사에 철저하다. 과거 생트 샤펠에 혼자 방문했다가, 별안간 법원 안을 헤맸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생트 샤펠 안에 들어갔다.


생트 샤펠 성당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스테인드글라스는 2층에서 볼 수 있다. 1층에서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2층에 올라가니 엄마와 동생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세 벽을 둘러싸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유명세만큼 아름다웠고, 사람도 많았다.

동생과 사진을 찍는 사이, 엄마는 바깥에서 벽에 장식된 조각들을 보고 있었다. 생트 샤펠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안 보고 조각을 보는 사람은 처음 봤다.

덕분에 나도 생트 샤펠 성당의 외부가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트 샤펠 성당 근처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비록 뒷부분이 전소되었지만, 정면은 남아있어 엄마와 동생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줄 테니 웃어보라고 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엄마


사진을 찍으려고 멈춘 우리에게 일명 싸인단, 그러니까 소매치기 겸 사기꾼들이 접근했지만 무사히 해쳐 나왔다.

역시 파리는 방심할 수 없는 도시다.




이제 본격적으로 미술관 투어의 시작이다.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빼놓을 수 없다.

여러 미술관 중에서 우리는 오랑주리 미술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루브르 박물관도 유명하지만, 루브르에 들어갔다가는 그 넓은 곳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할 것이고, 엄마와 동생은 힘들어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대중적인 작품이 많은 오랑주리와 오르세를 선택했다.



내가 아는 엄마는 그림을 좋아한다.

대학교 때 돌아가신 서울 할아버지는 수채화를 그리는 것을 즐기셨다. 그런 예술적 성향을 물려받은 엄마는 결혼 전엔 스카프나 카펫 등에 색을 넣는 텍스타일 일을 했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주방의 한쪽 벽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엄마는 화가 마르크 샤갈을 좋아했고, 미술관 전시를 가보고 싶어 했다.

동생은 비록 미술에 관심이 없었고, 엄마가 마드리드에서 갔던 프라도미술관에서 반응이 별로 없긴 했지만, 모네, 르누아르, 고흐 등의 유명한 그림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튈르리 공원의 분수대


오랑주리는 오렌지 온실이라는 뜻으로, 오랑주리 미술관은 과거 겨울에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로 사용되었던 작은 미술관이다.

튈르리 공원의 입구에 위치한 오랑주리 미술관은 모네 전시실로도 유명하다.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원칙을 고수한 모네는, 자신의 작품 ‘수련 연작’을 자연광이 들어오는 흰 벽에 걸어 전시하길 바랐다. 모네 전시실은 모네의 바람을 적극 반영해 특별 설계된 공간이다.



모네 전시실과 엄마


어느 순간 사라졌던 엄마는 모네 전시실에 자리를 잡고 수련 연작을 감상하고 있었다. 엄마가 감상을 하도록 그냥 두어야 했지만, 괜히 그 모습이 좋아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어때?”


내 물음에 엄마는 좋다고 했다.


한편 동생은 수련을 배경으로 두고 사진을 찍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내가 몇 장 찍어주자 다시 포토스팟을 찾아 사라졌다.

이제 다시 수련 연작을 감상하려는데, 어느새 일어난 엄마가 가자고 했다. 벌써? 엄마는 다 봤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무네의 수련을 감상하기도 한다는데,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지하로 가는 길목에 걸린 호크니의 작품


엄마와 동생이 화장실을 간 사이, 메일함을 확인해보니, 벌써 아침에 한 PCR 검사 결과가 도착해있었다.

아무 증상도 없지만, 그래도 어찌나 떨리던지.

파일을 여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확진이 되면 어떤 숙소를 예약해야 하는가까지 생각했다.


결과는 다행히도 모두 음성이었다.

여행 내내 마음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마저 여행을 즐기고 한국에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 기쁜 소식을 엄마와 동생에게도 알렸으나, 뭐 당연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좋아하냐는 핀잔만 들었다.





세느강을 건너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하는 길에, 군밤장수가 팔고 있는 군밤을 먹어보았다. 맛은 그냥 그랬다. 딸기도 그렇고, 군밤도 그렇고, 한국 것이 제일 맛있긴 하다. 엄마와 동생은 목이 막힌다며 콜라를 찾았다. 콜라는… 없어요.



예전에 오르세 미술관의 대기줄이 너무나도 길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줄이 하나도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은 기차역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미술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장도 높고, 건물의 외벽 양 끝에 거대한 시계가 자리 잡고 있다.



오르세미술관. 외벽 시계는 나의 옛날 사진으로 대체한다



1층을 보고 바로 5층으로 먼저 올라가자는 내 말에, 엄마는 미술관이 5층까지 있냐며 벌써 기절할 것 같다고 했다.

역시 루브르 박물관은 안 가길 잘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천장이 높은 통 건물이기 때문에 1층과 5층을 제외하고는 2, 3, 4층은 계단이나 중간 테라스뿐이 없으니 말이다.



오늘로써 오르세 미술관은 나에게 세 번째 방문이지만, 올 때마다 좋다.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 작품의 해설을 듣는 것도, 작품의 위치가 바뀐 것도 모두 재미있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쉬고 있을 테니 나에게 혼자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동생은 그렇다 치지만, 엄마는 그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나?

엄마에게 고흐, 르누아르의 유명한 그림들을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냥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과 보는 것을 분리하지 못했었다.

그냥 그렇다는 엄마를 인정하기로 했다. 엄마는 홀로 터덜터덜 떠나는 나에게 천천히 따라가겠다며 손을 흔들었다.




오르세 미술관의 5층에는 교과서에서만 보던 작품들이 넘쳐난다.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꽃밭’ / 고흐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모네의 그림은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 연작처럼 밝은 곳에 걸려있고, 고흐의 그림은 어둡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에 걸려있다.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 ‘파란 옷을 입은 무용수들’


드가는 무용수를 모델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남자 무용수는 그린 적이 없다. 오직 여성 무용수만을 그렸다.

때문에 무용수인 동시에 매춘의 대상이 되는 그녀들의 몸에 대한 환상과 환멸의 현실을 고발한다는 의견도 있고, 모델이 된 무용수들에게 몇 시간씩 뒤틀린 발레 자세를 시키며 학대했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청동 조각상인 ‘14세의 어린 무용수’의 경우, 소속되어있던 발레단에서도 모델을 하느라 결석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소녀를 작품이 완성된 이후에 해고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소녀는 어머니와 언니를 따라 매춘의 문턱에 떠밀려진 것이다.


드가에 대한 평가는 나뉘지만, 어찌 되었든 발레 자세를 취하는 여성에게 집착했다는 면에서 변태 같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다.



피에르 보나르의 ‘고양이’. 예나 지금이나 고양이는 귀여운 모델이다.





뒤이어 온 엄마는 오르세 미술관이 1층과 5층뿐인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볼걸 그랬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빨리 숙소로 돌아가자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 숙소로 가자.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는 한국의 퇴근길의 지하철처럼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리가 미술관에서 나온 시간이 파리의 퇴근시간과 맞물렸나 보다. 파리는 관광지를 제외하곤 항상 여유로운 도시인 줄 알았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엄마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니! 엄마는 입도 열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타는 것은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피해야 한다.




오늘은 에펠탑이 보이는 이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숙소 예약 문제로 내일은 다른 한인민박으로 떠나야 한다.

에펠탑도 보이고, 우리끼리만 사용하는 이 숙소에 익숙해졌는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날인만큼, 동생과 둘이서 가까이에 있는 에펠탑을 보러 가기로 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지갑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동생에게 기다리라고 한 후, 지갑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런데 동생이 사라졌다.

디즈니랜드에서의 엄마에 이어, 이번에는 동생의 차례인 것이다.


숙소 근처를 아무리 찾아도 동생은 없었다. 에펠탑에 갔겠거니 하는 마음에 에펠탑 쪽으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봐도 동생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핸드폰으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엄마가 사라졌을 때는 걱정과 불안만 가득했다면,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에 이골이 났다.

분노 게이지가 오른 상태로 파워워킹을 하고 있을 때, 인종차별주의자 남성 둘이 나를 놀래킨답치고 내게 다가와 소리를 질렀다. 잔뜩 화가 났고,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두 인종차별주의자는 그런 나를 보고 낄낄 거리며 사라졌다.

더 화가 났다.


그렇게 에펠탑의 전경이 보이는 사이요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야 동생에게 어디냐며 연락이 왔다. 어디야?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구글맵으로 지금 있는 장소를 찍어 보냈다. 여기로 와.


앉아서 화를 식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화가 조금 가라앉으니 주변에서 찌린내 나기 시작했다. 파리는 오늘 내게 왜 이럴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때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확인해보니 구글맵 사진이었다.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동생에게 보이스톡을 걸었다.


“내가 먼저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잖아.”


동생은 근처인 것 같다며 빨리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다. 따지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데이터가 잘 터지지 않아 보이스톡이 끊겼다.

발을 쾅쾅 구르며 동생이 보내준 구글맵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포토스팟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앞사람들이 사진을 다 찍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화가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 사람 똥개 훈련시켜?”


뾰족한 내 말에 동생은 태연하게 왜 그러냐 물었다. 왜?!?!

동생은 내가 지갑을 가지러 올라간 사이, 정각마다 하는 에펠탑의 조명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에펠탑 쪽으로 가서 나를 기다렸다고 한다.

사람을 기다려야지, 에펠탑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묻자, 자기는 중요하다며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은 언니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그때, 정각이 되어 에펠탑의 조명쇼가 시작되었다.

동생은 핸드폰을 들어 영상을 찍기 시작했고, 일단 영상을 찍는 중이니 나도 입을 꾹 닫았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조명쇼가 끝나고, 동생에게 말했다.


“이 와중에 그게 그렇게 찍고 싶냐?”


이 말에 동생도 울컥했는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번 와봤겠지만, 본인은 파리가 처음이라 모든 것이 새롭고 좋은데 왜 배려를 안 해주냐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배려를 해달라는 거야! 너 두고 가버리고 싶은 것도 얼마나 많이 참았는데!

동생은 버리고 갈 테면 가보라며 악을 썼다.


그 사이, 우리가 사진을 찍을 차례가 되었다.

나는 싸움을 멈추고 퉁명스럽게 빨리 가서 서보라고 했다.

동생의 눈썹은 잔뜩 올라가 있었고,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 웃으라고!”


이후 여행을 하면서 생겼던 작은 앙금들을 털어내며 소리를 지르면서 싸웠다. 그러다 사진이 괜찮게 나올만한 곳을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다시 싸웠다.

그 덕에 사진만 보면 아무도 우리가 싸웠는지 모를 것이다.



에펠탑 아래를 지나면서 앞으로 말없이 사라지지 않고, 엄마를 우선으로 하기로, 그리고 무언가를 찾을 때는 함께 찾기로 약속했다.

동생은 알겠다면서도,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에펠탑 앞에는 잡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여러 에펠탑 관련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는데, 동생이 에펠탑 열쇠고리를 사야겠다고 했다.

나는 숙소에서 그대로 지갑을 두고 나왔으면 어쩔 뻔했냐며, 동생에게 1유로를 주었다. 그리고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알아서 흥정해 구매하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흥정을 할 때, 개수를 많이 부르고 조금씩 깎는데, 동생은 된다고 하면 계속 개수를 높였다.

그렇게 동생은 1유로에 에펠탑 열쇠고리 7개를 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놈의 반짝이는 에펠탑



여행을 하면서 싸우는 것은 손해라고 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동생과 싸울 것을 예상하긴 했다.

그게 생각보다 늦어져 이렇게 관광지의 한 복판에서 사진을 찍는 중에 싸울 줄은 모르긴 했지만 말이다.

싸우고 사진 찍고, 다시 싸우고 사진 찍으면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남은 것들도 있고, 빨리 결정지을 수도 있었다.

예전에 동생과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도 대판 싸운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서로 끝까지 웃지도, 사진을 찍지도 않았다. 그래서 막판에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고, 그때를 언급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금기시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에펠탑 앞에서 싸운 순간은 하나의 추억처럼 남게 되었다. 지금도 동생과 에펠탑 앞에서 싸웠던 것을 떠올리면, 서로를 탓하며 어이없어한다.


역시 웃는 게 답인가 보다.

특히 여행 중엔 웃어라. 그래야 사진이 나와 함께 웃으며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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