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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Jan 01. 2019

독일, 첫걸음.

2007년 11월

2007년 말, 나는 자그마한 독일 여행 가이드 북 한 권과 간단한 독어 회화책 하나를 무릎에 놓고 상공위에 있었다. 아*(a), 베(b), 체(c), 데(d), 그리고 이제 막 Bitte (please), Guten morgen, Guten Tag 등을 익히고 있었다. 만 18세의 패기일까, 독일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습득하지 않은 채, 독일은 이럴 것이다라는 느낌만으로 언어도, 문화도 익히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유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항공기 안에서는 몰랐던 곧 다가올 나의 외로운 삶을 시작할 도시는 바로 뮌헨이었다. 

뉴질랜드에서 같이 유학할 때 알게 된 한 독일인 친구의 고향이자 강력한 추천지였다. 




유럽에 꿈이 있어서 떠나는 유학이 아니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집안의 파산을 배경하여 아주 슬픈 이유로 독일행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 필라델피아 예술 대학에 4만 유로의 장학금을 확정받고, 기숙사도 배정받고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집안 사정은 급격히 기울었고 앞으로 4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자 아빠는 그나마 학비가 들지 않는, 그리고 국민들이 검소하다고 알려진 독일을 추천하셨다. 


같이 입시를 준비하던 학원에서 가족같이 친해진 미술 지망생들이 하나, 둘 미국으로 떠날 때 즈음 나는 다른 방향의 독일행을 타게 되었고. 다시 독일이라는 생소한 나라에서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나에게 슬럼프는 예견되었듯 시작되었다. 



하필이면 날씨 또한 겨울이었다. 알프스바람을 그대로 받는 뮌헨지역의 겨울은 길고 춥고 어두웠다. 건물도 우중충하니 환경적으로도 나의 정신력은 도움을 받기 힘들었다. 


그나마 공항에서 마주친 금발의 예쁜 독일 여성이 친절하게 길 안내를 도와줘서 첫 독일인의 이미지는 좋았다. 게이트를 나가니, 친구가 공항에 조그만 해부학 암기 카드들을 잔뜩 들고는 날 마중 나왔다. LMU 의대생이었던 그는 신용카드 한 장 정도의 크기의 암기 카드를 잔뜩 들고 나와 이야기하면서도 중간중간 카드를 확인했다. 지하철로 친구의 집까지 이동하는 동안의 독일의 풍경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굉장히 황량했다. 넓은 황야처럼 보이는 들판, 겨울이라 풀이 색을 바꾼 이유이겠지만 하늘 전체가 회색이니, 하늘 아래 땅이 밝을 리 없었다. 


지하철은 너무 낡고 오래돼서 핸드폰 전파도 안 터지고, 지하철 양쪽문들이 닫힐 때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쾅쾅하고 났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제일 먼저 발전한 덕에 다른 도시들보다 더 낡은 것들을 유지해야 했던 뮌헨이어서 여행객들에게는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고풍스러운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그저 뉴욕시티의 빛나는 유리창들의 환상으로 가득했던 내 머릿속은 역사 따윈 안중에 없고, 보이는 삭막함에 실망만 가득했다. 


뮌헨 친구 집에서, 친구 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


친구의 집은 5층 복층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죽 살아왔다고 했다. 디즈니 신데렐라에서 나왔던 커다란 쇠로 만든 열쇠로 1층 문을 따고 이민가방을 들고 올라가는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그야말로 내 삶을 반영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삐걱거리는 거실, 집안이지만 밖에 있는 것 같이 바람 부는 추운 화장실, 집 안에 있는 기둥들과 무언가 차지 않은 부족해 보이는 거실, 뭔가 부족한 그 공간을 채우려 애쓴 듯 아기자기하게 벽에 전시된 친구와 동생의 어렸을 적 스케치들, 문틀을 따라 꾸며진 조명,, 내 첫 독일집의 이미지이다. 




2007년은 고작해야 2달을 독일에서 지냈을 뿐인데 아직까지도 내게는 가장 길었던 첫 해 같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10대 청소년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타지에서 달랑 2천 유로와 가이드북, 회화책 그리고 옷가지만 챙겨가지고 시작하기에는 모든 것이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Haxenbauer

나의 미련함은 대단했다. 오죽했으면 처음 유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불세트나 수건 등을 필요한 용품들을 사라고 쥐어준 돈을 밥을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뮌헨에서 유명하다는, 나폴레옹도 왔다 갔다던 학센 바우어 레스토랑을 가이드북에서 찾아 여행객 인척, 매일같이 식사를 하며 탕진했다. 그런 식으로 온실 속에 자라온 티를 내며 세상물정 모르고 아빠의 피 같은 돈을 탕진하였으나,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들이라도 있어서 더 큰 어두움에 빠지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한 번은 장을 보겠다고 나서서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온갖 병에 포장된 음료수와 식재료들을 사서 커다란 봉투 4개에 나눠 담고 집에 가려는데 혼자 들 수가 없음을 장을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낑낑거리며 겨우 택시를 잡아 타고 교통비로 50유로를 나의 무지한 대가로 지불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장을 보면 내가 스스로 집까지 들고 오는 거구나... 갓 온실 속에서 홀로 서기를 하겠다고 나온 나의 뇌는 정말 순수하고 하얗기만 했다. 


친구 집에서 나와 살게 된 정신과 박사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집에서는 한번 부드럽게 혼나기도 했다. 아무 생각 없이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문득 부엌으로 들어오더니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옆에 짝다리를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하녀는 아니잖아"

"??"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음식 쓰레기통을 보여주며 쓰레기를 밖에다 가져다 버려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걸음마 가르치듯 집안일을 알려주는 독일 할머니의 생각은 아시안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당시에는 여태껏 같이 사는 집을 깨끗하게 잘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던 내게는 이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렇다. 엄마라는 내 모든 뒤치다꺼리를 처리해 주던 사랑이 넘치던 집에서, 그리고 가디언을 끼고 홈스테이 생활했던 청소년기와는 다른 독립된 삶이었다. 부엌을 깔끔히, 방 정리정돈만 하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낸 쓰레기 정도는 밖의 쓰레기통까지 골인을 해 놓아야 하고, 밖에 달린 우편통에는 스스로 내 이름을 붙여놔야 내 우편물들이 반송되지 않았다. 울타리 없는 세상 밖으로 나온 삶은 이번이 제대로였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뮌헨 마리엔플랏츠

시스템도 너무 달랐다.  한 번도 신청해보지 않은 비자를 받기 위해 외국인청에 가서 그 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서류를 작성하는 일, 은행계좌를 열기 위해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는 일, 비싼 전자기기를 할부로 사기 위해 카드를 내밀었다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현금을 뽑아 들고 가야 했던 일. 그 당시는 독일인들이 카드를 기피하던 시절이라고 할 정도로 현금을 선호했다. (2019년 1월 1일인 아직도 몇 작은 소 가게에서는 현금밖에 안 받는 곳이 많을 것이다.) 유럽은 선진국이 아니었던가? 서서 줄을 기다리고, 은행업무도 바로바로 해결이 안 되고? 카드는 지갑이 허전할까 봐 만들어준 것일까? 뭐 하나 내가 알던 대로 되는 게 없었다. 


생활 속의 모든 것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영어로 겨우 겨우 스스로 신청한 인터넷도 잘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USB처럼 꽃아 쓰는 이동식 인터넷을 신청했었는데 겨우 이메일이나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는 국제전화카드를 사서 저 멀리 공중전화나 집전화를 이용하여 집에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전화비 또한 상당히 비쌌다. 아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 참 빨리 변했구나. 그 당시 카톡만 있었어도 그렇게 우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라테는 말이야]


그래도 18세 이상 성인이라고 집에서 마셔가는 맥주의 병수는 늘어갔다. 하루는 침대 머리맡에 늘어진 병들을 보며 오늘은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몸에서 알코올을 불렀다. 이러다가 알코올 중독자가 되겠다 싶어 바로 스스로를 절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에 무엇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지, 너무 부족한 정보력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갈피를 못 잡는 날들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그냥 하루는 된장찌개가 너무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었다. 그나마 기분이 좋을 수 있었던 건, 우연히 나가게 된 뮌헨 도시에서 발견한 크리스마스 마켓. 유럽여행은 와보긴 했지만 혼자 시간이 넉넉히 남았던 적은 없었던지라 남는 게 시간뿐인 그 시간에는 한참을 서성이며 즐겼던 기억이 있다. 


Weihnachtskugeln

언제나 바쁘던 의대생 친구는 잠시 숙소만 제공해 줬을 뿐 나의 외로움을 덜어주지는 못하였고 우울감 덕분인지 집에서 대략 20시간씩 잠을 자던 내게 크리스마스 마켓은 그 예쁜 분위기처럼, 반짝반짝 꾸며진 따듯한 느낌을 풍기는 조명들처럼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내 몸을 움직여보겠다는, 열정을 흔들흔들 일으켜주었다.

호두 까기 인형들

이 마저도 정작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휑하니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다시 어두운 외로움 속으로 걸어갈 때 즈음 고등학교 때 먼저 성악으로 함부르크로 유학을 가 있던 친구가 연락이 왔다. 이번 연말에 한국에서 온 친구 한 명이 여행을 오는데 놀러 오겠다고, 독일에서는 연말에 항상 폭죽놀이를 한다며 같이 보러 나가자고. 마침 친구 집에서도 나와 독립을 시작하던 차라 하루가 1년 같던 그 시기에 너무 반가운 소식이었다. 


2007년 12월 31일 마리엔 플랏츠 Marienplatz


한국처럼 한강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것이 아닌, 개개인이 들고 나온 폭죽이나 시에서 약간은 높게 쏘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볼 수 있을 정도의 폭죽놀이는 딱 1년에 하루, 12월 31일에 허락된다. 이 폭죽놀이를 앞으로 10번을 더 볼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 했지. 이렇게 나의 2007년은 터지는 폭죽들과 함께 독일에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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