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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 Jan 08. 2019

독일 1년 차 어학생

2008년, 칼스루헤로.

독일로 오는 비행기는 루프탄자를 이용했는데, 일찍이 들어가 내  좌석에 비스듬히 앉아서 한 명 한 명 밀려들어오는 승객들을 보고 있자면 다 코 높고 얼굴 하얀 독일이었다. 게 중에 한 명, 아시아 계열이 보였는데 하필 내 옆으로 앉는 것이 아닌가. 이왕이면 가는 그 긴 시간 동안 독일 친구도 사귀고 아니면 영어 연습도 할 겸 외국인과의 대화를 기대했던 나에게 아시안 한 쌍을 붙여놓는 처사는 왠지 모를 인종차별 같았다.

몇 개월 뒤에 그 사람과 사귀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당연히 동남아계라고 생각했던 그는 한국인이었다. 아주 친절한 한국인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내 자는 나를 식사시간마다  깨워주고, 독일이 처음이라는 나를 위해 자신의 비상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 연락처는 바로 몇 달 뒤, 친구집에서 나와 새로 얻은 자취방  집주인이 자기 아들이 다시 집에 들어오게 됐다며 갑자기 방을 빼라고 했을 때, 정말 비상으로 쓰게 되었다.


그 분이 당연히 뮌헨에서 집을 구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 당연히 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만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의 생각의 차이는 연락이 닿은 지 한 참 뒤, 방을 빼야 하는 날이 거진 다 다가와서 서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쉬운 사람이 찾아가는 당연한 원리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렇게 나는 또 칼스루헤로 나의 거처를 찾아 이동하였다.


나의 룸메들과 함께

독일은 보통 대학을 진학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고, 한 집을 구해 방을 나눠 쓰며 집값을 방 크기대로 나눠서 쓴다. 이때, 모르는 또래들과 같이 살아야 하니, 집에 미리 들어와 있던 친구들은 이제 집을 구하려는 많은 학생들과 인터뷰를 나누고 본인들의 취향에 어느 정도 맞겠다 싶은 친구를 들인다. 말은 친구들과 또이또이 편하게 노는 것 같지만 그 경쟁률은 흡사 중소기업에 면접을 보러 다니는 지원자들을 방불케 한다. 나는 다행히도 키도 비슷비슷하고 성격이 밝은 독일인 친구, 프랑스와 태국 혼혈인 친구와 함께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 듣기론, 인터뷰 때 신고 간 나의 반짝거리는 은색 구두가 그들의 마음을 끌었다고 한다.


독일 사람들은 대부분 청소년이던 어른이던 꽤나 깔끔한 편이다. Frische Luft, 상쾌한 공기와 Hygiene, 위생관념이 철저한 편이다. 같이 쓰는 공동주방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집안 청소도 일주일마다 당번을 정해서 청소를 해야 한다. 꽤나 철저한 만큼 공용으로 사서 쓰게 되는 생활용품도 언제나 3 등분하여 계산하였다.


칼스루헤에서의 삶은 비교적 여유롭고 평안했다. 그 당시는 대학 준비에, 포트폴리오에 많은 압박감이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입시미술을 떠나 내가 하고 싶은 미술을 하며, 친구들과 놀아가며 어학을 배웠기에 내 독일 생활 중 가장 자유로웠던 기간이 아닌가 싶다.

집에서 마페준비하던 시절
에딩으로 거울에 시도해봤던 첫 일러스트

필리핀계로 오해당했던 당시 남자 친구는 ZKM이라는 학교를 소개해줬다. 미술 박물관에 붙어있는 학교인데, 학생들의 수준이 꽤나 높았다. 독일의 뉴욕 SVA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도 전시되었던 박물관이다. 독일에서는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기 전에 교수들이 날을 잡아서 지원자들과 만나 면담을 해주는 시기가 있다. 이때 본인들의 작품을 들고 가서 교수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들을 수도 있는데, 이 학교는 디자인 분야가 우세해서 순수미술을 준비했던 나와는 수준 차이가 너무 났다.

ZKM내부

미국의 스케치 기반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던 나는 순수미술이기에는 테크닉이 높고 창의력이 낮았다. 그래픽이기에는 컴퓨터 기술은 접해본 적도 없었다. 독일의 지원자들과 너무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었다. 독일 학생들은 학원을 다니거나 누구에게 그림을 배우지 않고 스스로 개발해왔기에 내 눈에는 개발새발의 그림이었으나 아이디어가 교수에게 칭찬받기 마땅했고, 디자인 분야에 와서는 이미 전문가 수준을 넘나드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 홀로 학교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들고 온 학생 같았다.

나름대로 창의적인 포트폴리오라고 준비했던 내게 그 면담시간은 상처였고 절망이었다. 같이 포트폴리오, 즉 마페를 준비하던 홍대를 졸업한 언니와 함께 준비하고 면담을 다녀봤으나 다니면 다닐수록 독일의 예술과는 맞지 않는 것만이 분명해져 왔다.


그나마 다행히도 미술은 내가 늙어서 은퇴하고는 시골마당에 앉아서 그림 그리던 그 꿈을 미리 끌어다 온 것이어서 이 시기에 포기하기는 쉬웠다. 즐길 만큼 즐겼고, 나이들어 그림을 그릴만큼은 실력이 된다는 생각에.  

다시 장래희망이 없는 학생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조급해져 오고 2년이라는 허락된 어학 기간 안에 대학을 붙어야 독일에 계속해서 거주가 가능했다. 그래도 아직 1년 남았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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