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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서재 Apr 14. 2023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구의 증명〉최진영

‘구’의 증명은 구가 증명을 하는 것인가?

무엇을?


아니면 ‘담’이 ‘구’를 증명하는 것인가?

왜?       


적나라한 표현과 직설적인 문체 덕에 몰입도 최강이었다. 읽는 과정에서의 현실을 소환하는 도덕적 잣대 탓에 혼란스러운 지점도 다소 있었지만, '담'과 '구'의 극단적이고 처절한 사랑에 설득되어 도덕률 따윈 개나 줘버리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구의 증명>은 다소 그로테스크한 연인의 시체를 먹는 ‘담’의 애도 방식을 끌고 가면서 독자를 소설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결국 지독한 현실 앞에서 자기네들 방식대로 사랑했고 자기네들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다.      



“너를 보고 싶었다.
낡고 깨진 공중전화부스가 아니라, 닳고 더러운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잡초가 아니라, 부옇고 붉은 밤하늘이나 머나먼 곳의 십자가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다 죽고 싶었다. 너는 알까?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를까? 네가 모른다면 나는 너무 서럽다. 죽음보다 서럽다.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다 나는 죽었다. 너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다.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 (p.16)     


죽어가는 순간에 유일하게 사랑하는 담을 애절하게 찾는 ‘구’의 절망감이 감각적으로 묘사된 부분이다. 죽어가면서 또는 이미 죽은 ‘구’가 의식을 가지고 담이 오기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어느 누아르 한 장면처럼 어두컴컴한 골목 안쪽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털썩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는 '구'를 상상해 본다.  



“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올 거야. 그런 날이 오면 너 모르는 데로 가서 나 혼자 죽을까? 그러는 게 나을까? 그건 가장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나는 대꾸했다. 그리고 부탁했다. 우리 앞으로 함께 해야 할 것들, 함께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시시콜콜 다 이야기한 다음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는 우리 좀 더 건강해진 다음에 농담처럼 나누자고. 말을 끝내고 다시 눕는데, 구가 말했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p.19)     


구는 담에게 “내가 죽으면 어떡할래?”라고 묻는다. 담은 구에게 “너를 태우기도 묻기도 싫으니까. 절대 나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구는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네가 먼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라는 예측 가능한 연인들의 대화가 아닌 너와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는 당돌한 선언이다.          


담은 막상 구가 죽자 시체를 안고 “없는 사람 취급받던 사람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p.38)며 구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우리는 담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세상 끝까지 몰리다가 사람 취급 하나 받지 못하고 살다 간, ‘구’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로 떨고 있는 담의 작은 몸뚱이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방에 누이고 소독용 알코올로 몸 전체를 꼼꼼히 닦았다. 입속과 콧속과 배꼽과 항문까지, 다 닦았다. 손톱과 발톱을 깎아주었다. 깎인 손톱과 발톱 조각은 내가 먹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겨주었다 빠진 머리카락도 내가 먹었다. 꿀꺽 삼켰다. 작은 구는 그새 더 작아져버렸다. 가만히 앉아서, 외로운 빛으로 변해가는 구의 몸을 바라봤다. (p.37)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타자들의 생태학》에서 관계론적 존재론을 다룬다. 모든 존재는 타자와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으로 인간과 비인간 즉, 인간과 타자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담과 구는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담은 구를 타자로 인정할 수 없고 그의 신체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이 소설의 가장 처연하고 비극적인 이 장면은, 담이 구의 시체를 해체하여 먹음으로써 구의 타자화를 거부하는 모습이다.


반면 사르트르는 신체론을 피력하면서, 신체를 의식 같은 것으로 보는 심신일원론을 제기한다. 단편 <어느 지도자의 유년 시절>의 주인공인 뤼시앵은 자신의 신체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객체화되고 즉자화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의 신체가 그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가 있을 때는 언제나 그의 신체가 그 타자의 시선하에 놓이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로 인해 그는 항상 불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즉, 바라보임을 당할 때 나는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타자를 바라볼 때, 그 타자도 존재하는 게 된다. 그 증거가 불안인 것이다.


담은 구를, 구는 담을 바라본다. 구는 이미 시체가 되어서도 계속 담을 생각하고 담을 부른다. 구의 신체를 뜯어먹는 행위로 담과 구는 영원히 서로를 바라보며 존재하기에 이른다.



아야세 마루의 단편소설 <치자나무>의 그로테스크적 상황을 대비해보자. 10년간 불륜관계였던 남녀. 남자는 지금까지 결혼을 위한 예행연습에 불과했다며 헤어지자고 한다. 남자는 배상으로 돈을 주겠다고 하지만, 여자는 왼팔 하나를 달라고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팔을 떼어준다. 여자는 남자의 팔과 잠들고 팔과 대화한다. 어느 날 남자의 아내가 여자를 찾아온다. 아내는 여자에게 자기 남편의 팔을 달라고 한다. 여자는 아내에게 남편과 당신은 일체나 마찬가지니 남편의 팔과 당신 팔을 교환하자고 한다. 아내는 자기 팔을 떼어 여자에게 주고 남편의 팔을 돌려받는다. 여자는 꿈을 꾼다.


그날 밤, 희한한 꿈을 꾸었다. 나는 흐느끼는 아쓰타 씨 부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녀의 울음은 멎지 않았다. 온몸이 푸른빛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단 팔이라도…….”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그녀의 몸에서 사랑스러운 팔을 떼어냈다. 슬픔에서 분리된 팔은 부드러운 하얀빛을 발하며 솔직함과 온화함을 되찾았다. 아직도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다른 한쪽 팔도 떼어냈다. 이로써 그녀의 6분의 1 정도는 울음을 그친 셈일까. 치마를 들어서 포동포동한 허벅지를 누르며 두 다리도 떼어냈다.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새하얀 살갗을 손등으로 어루만지며 몸통의 경계선을 찾았다. 배꼽 바로 아래, 명치, 가슴 사이. 찾아낸 경계를 하나씩 분리할 때마다 부인은 점점 줄어들었다.(p.31)



신체를 조각조각 분해하여 소유하고 마는, 이 세계의 기괴한 애정 표현은 낯설고도 대담하다. 연인의 신체를 소유함으로써 애정의 빈틈을 메우는 방식은 팔을 소유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치 그가, 그녀가 여자 옆에서 온전히 함께하는 것처럼 팔을 살아서 꿈틀거리고 치자나무 꽃을 어루만진다. 남자의 아내는 온전히 남자의 육체를 소유하려고 했다. 팔 하나가 여자에게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고 기꺼이 자기 팔을 떼어준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팔 하나에도 의지가 됐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일부를 거부하고 전체를 원하는 아내의 태도에 의외의 충격을 받고 악몽까지 꾸게 된 것이다.


일부를 소유한다? 전체를 소유한다?

 

<구의 증거>에서 담과 구는 먹고 먹힘으로써 서로를 동시에 소유한다. 여기에는 믿음 혹은 동정 혹은 일체라는 사랑의 다른 이름들이 자리하고 있다. <치자나무>는 소유와 동시에 허무를 다룬다. 죽은 애인과 헤어지지 않으려고 시체를 먹는 '담', 헤어진 남자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려고 팔을 가지는 '여자'.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작품들의 극한의 집착을 향한 매혹적이면서 슬픈 은유의 세계에 동기화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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