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판을 실컷 누리자. (영화 보기)
우리 가족에게 주말은 늘 특별하다.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면서 남편과 나는 암묵적으로 약속한 게 있다.
‘데리고 다닐 수 있을 때 많은 걸 함께하자.’
사춘기, 또래가 좋은 시절이 오면 언제든 밀려날 부모다. 나도 그랬고,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부러 주말만큼은 다양한 계획을 세우고는 했다. 목요일쯤 되면 남편에게 카톡을 보낸다.
“이번 주에 어디 갈까?”
날씨가 좋으면 공원에 나가 자전거나 인라인을 탔고, 날씨가 허락하지 않는 날엔 박물관이나 과학관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익숙한 곳에서는 편하게 뛰어놀았고, 새로 간 곳에서는 호기심을 발휘해 이것저것 탐색했다. 적은 돈으로 참 많이도 다녔다.
아이들은 정적인 학교 수업에서 벗어나 몸으로 익히는 세상이 즐거웠을 것이다. 엄마인 나도 아이들과 의미 있는 주말을 보냈다는 것에서 육아 효능감을 얻곤 했다.
근데 무려 사이판에서의 주말 아닌가. 원래 토요일이나 일요일 중 하루는 조용하게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집에서 자유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사이판 숙소는 좁아서 도무지 자유롭기가 어렵다. 일단 나가야 했다. 아빠 없는 첫 주말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엄마와 두 아이가 의견을 모았다. 사이판에 있는 유일한 영화관에 가는 것으로. 구글 지도 앱을 켜 ‘Regal Saipan’을 검색했다. 숙소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무려 멀티플렉스였다. 영화는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골랐다.
<Migration>
국내에서는 <인투 더 월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영화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께는 좀 죄송하지만, 스포를 좀 하자면 오리 가족이 본래 살던 연못을 떠나 자메이카까지 날아가는 긴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새로운 세상을 찾아 떠나는 오리 가족의 때로는 위험하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기가 어렵다. 내 영어 실력이 딱 여기까지니까) 애니메이션이라 영어가 귀에 쏙쏙 박힐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절반 정도만 들렸다. 중간에 아이들을 슬쩍 돌아보니 즐거운 이야기에 푹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 진짜 재밌지 않았어요?”
50% 알아들은 나도 재미있었는데, 90% 알아들었다는 너희는 얼마나 재밌었겠니. 아이들과 어른의 시선에서 모두 흥미로운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먹은 팝콘은 사이판에 와서 먹은 과자류 중에 가장 입맛에 맞았다. 마트에서 산 과자들은 대개 너무 짜거나 달아서 먹으면서도 내 몸에 죄책감이 많이 들었다. 영화와 간식, 이 모든 게 완벽했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가고 우리 셋만 남은 첫날이었다. 엄마는 앞으로 운전과 돌밥(돌아서다+밥)을 온전히 책임져야 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영어는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핑계 맞다. 어쨌든 영화 티켓을 끊고 팝콘을 사는 과정을 아이들이 직접 하도록 했다. 어렵지 않은 단어로 주눅 들지 않고 주문하는 아이들이 어찌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어려운 단어로 고급스럽게 말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뜻이 통했으면 된 거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포스터로 본 ‘쿵후판다 4’에 대해 이야기했다. 혹시 사이판에서의 두 번째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이만하면 오롯한 일요일 오후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는 다짐이었지, 굳이 안 해도 될 일까지 할 결심은 아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우린 경쾌한 리듬의 클래식을 들으며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설거지였고, 큰아이는 부족한 수학 연산이었으며, 작은 아이는 여행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국영수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 한국 엄마의 본능이다. (다들 똑같다고 해 주세요.) 그러던 중 느닷없이 큰 사이렌 소리가 건물 내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근처에서 소리가 시작된 것처럼 높은 데시벨 소음이 쉼도 없이 귓속을 강하게 때렸다.
“불이야!”
우린 하던 일을 급히 멈추고 내복 바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나는 남 보기에 좀 후줄근한 옷차림이었고, 작은 아이는 연필을 손에 꼭 쥔 채였다. 3층인 숙소에서 계단을 내려오자 한국인 엄마가 2층 복도에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
“정말 죄송해요. 저희 방에서 난 소리예요.”
고기를 굽는 과정에서 다량의 연기가 발생한 모양이다. 2층 한국인 엄마는 연신 미안하다며 사람들에게 사과했고, 우리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경고음을 견디지 못하고 로비를 향해 귀를 막고 뛰어갔다. 로비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건물이 흔들릴 듯한 굉음이 멈췄다.
고기를 구웠던 엄마는 프런트에서 직원들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직원들은 괜찮다며,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환한 웃음으로 엄마를 안심시켰다.
연기에 경고음을 크게 울린 건물 소방시설에 좀 안심이 되었다. 그 경고음을 인지하고 바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간 남매의 행동에도 마음이 놓였다. 잠옷 바람으로 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저 연필을 손에 꼭 쥐고 나왔어요.”
“우리 아들 학구열 뭐야?”
안도의 웃음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을 때 비로소 긴 한숨이 나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모두가 무사하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진기한 경험까지 할 계획은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 한 장이 더해진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은 지금 물놀이에 지쳐 잠이 들었다. 왠지 오늘부터는 여권과 지갑을 현관문 가까이에 두고 자야 할 것 같다.
#Regal Saipan
*소소한 TIP
주말 오후 시간에도 영화관은 텅텅 빈 수준이었어요. 우리가 들어간 상영관에는 우리 가족과 2명의 청소년뿐이었습니다. 할 일 없는 주말! 영화관 홈페이지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찾아보세요. (에어컨 바람이 차니 얇은 겉옷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