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해질 자유
숙소는 주 1회 청소를 해준다고 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와 카페에 갈 명분이 생긴 것이다. 오늘은 어떤 카페에 가 볼까.
아이들과 헤어진 오전 7시 반. 리조트 한국 직원이 추천해 준 카페에 가 보기로 했다. 호기롭게 휴대폰 속 내비게이션 앱에 들어가 카페 이름을 검색했다.
아침 시간, 사이판의 왕복 4차선 도로에는 출근하는 차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겪은 것과는 다르게 길 위에 자비로운 운전자는 별로 없었다. 초행길 인 데다가 흐릿한 차선이 헷갈려 속도를 좀 늦추었더니 뒤에서 빵 경적을 울렸다. 차선을 좀 선명하게 그려주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국처럼 친절한 차선 따위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올 뻔했다.
‘너희들도 출근 시간에는 어쩔 수 없구나? 이제야 좀 인간적이네.’
7분 거리의 카페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왕복 4차선 도로는 경부고속도로처럼 위협적이었다. 적어도 20년째 초보 운전자인 나에게는 말이다. 겨우 도착한 카페 앞에 주차하고 잠시 운전석에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사고 내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곳이며 원두가 고소한 맛이라고 해서 찾아온 곳에 한국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왠지 서운해지려는 찰나 아메리카노(3.5달러)와 쿠키(1.5달러)의 착한 가격에 금세 위로를 받았다. 카페 직원과 웃으며 날씨가 좋다는 둥, 인테리어가 예쁘다는 둥 스몰토크를 하고 싶었는데, AI처럼 딱딱하게 필요한 주문만 해버렸다.
“Hot americano, please.”
자리에 앉아 숨을 길게 내뱉었다. 여행은 모름지기 좀 느슨해야 한다. 가끔은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창가 쪽에 가만히 앉아 여행 기록을 남겨보기로 했다. 노트북과 좋아하는 책도 소중히 들고 나왔다. 한참을 기록하고 책을 뒤적여도 10시가 채 되지 않았다. 더 길어진 오전 시간이 여유롭기만 하다.
여행지에서는 아이들에게도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사실 촘촘하게 챙길 정신이 없기도 하다. 서툰 영어에 두려운 운전도 해야지, 엄마의 마음도 바쁘다. 한국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을 달기만 한 간식을 이곳에서는 그냥 먹게 두었다. 친구들이 스낵 타임에 젤리나 초콜릿을 먹는다고 하니 유난스럽게 과일과 채소만 고집할 수도 없었다.
“여행 오니까 엄마가 너그러워지셨어요.”
몇 년 동안 공들여 만들어 놓은 약속과 규칙들은 길가의 들개에게나 줘버렸다. 고집스럽게 아침밥을 챙기던 엄마도 멀리 여행을 떠나왔으니까. 덕분에 아이들은 분주한 아침 시간에 스스로 아침 메뉴를 선택해서 먹는다. 선택지라고 해봐야 시리얼, 빵과 과일이 전부지만 말이다. (어제는 체력에 여유가 있길래 무려 달걀 볶음밥을 해줬다.)
간단한 아침 메뉴라도 괜찮다. 한 달 동안 간식으로 젤리빈을 먹는다고 큰 병이 생기지 않는다. 여행지에서만 허락된 달콤한 것들에 아이들 표정도 달큼해졌다.
사이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이들의 공부 계획이 참 거창했다. 매일 독서 30분을 하고, 수학 복습을 하며 혹시 틈이 나면 일기라도 써보자는 탄탄한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의 집중력과 체력을 고려하지 않은 엄마의 욕심이었다. 너무 단단한 가지라 바람에 쉬 부러졌을까. 막상 학교에서 돌아와 물놀이하고 나면 금세 자야 할 시간이다. 영어만 잔뜩 적힌 학교 숙제부터 하고 나면 어느새 독서는 뒷전이 된다. 독서와 수학 연산만큼은 병행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아이들에게 부담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잘못된 강박은 아이들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유로운 사이판에서는 이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느슨해져야 한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아이들의 학교에서 받아오는 숙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위인들을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큰아이가 받아온 사회 숙제 내용이다. 한글로 쓰려해도 만만치 않은 난이도다. 큰아이는 본인이 아는 영어 단어를 총동원해 몇 자 적었다. 문법과 스펠링이 다 틀려도 괜찮다. 영어로 본인 생각을 써보려는 시도 자체가 충분히 고무적인 일이다.
영어 숙제 또한 쉽지 않았다. 비슷한 의미의 단어를 찾아 쓰는 내용인데, 나조차도 모르는 단어가 많았다. 휴대폰으로 단어 뜻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유인물에 의미를 적는데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 이런데 독서는 개뿔. 겪어 보니 많은 걸 포기하게 된다. 아니, 처음부터 계획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학교 다녀와 물놀이하고, 학교 숙제를 하고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 공부(수학 연산, 지난 학기 복습 등)까지 잘 해내는 아이가 있다면 굉장히 훌륭한 사례이다. 하지만 그렇게 못해도 괜찮다. 아이들은 새로운 땅과 학교에서 충분히 애쓰고 성장하는 중이니까.
한국과 비슷한 일정을 소화해 내려는 고집을 많이 내려놓았다. 일상의 색깔이 달라졌으니 차츰 그에 어울리는 바탕을 찾아보기로 했다.
#Coffee Stop
*소소한 TIP
운전이 서툰 엄마라면 출퇴근 시간 운전은 피해 주세요. 곳곳에 공사 중인 도로가 많아 대도시 같은 교통체증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