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판 한 달 살기 DAY9

타국에서 맺은 인연

by 최민정

아이들의 수영복을 빨고 있던 바쁜 저녁 시간, 카톡 알람음이 울렸다.


‘내일 엄마들끼리 커피 한 잔 어때요?’


큰아이와 5A, 같은 반에 다니는 친구의 엄마다. 옆 반 친구 엄마와 셋이 카페에서 보자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도 사적인 학부모 모임은 잘 안 나가는 아줌마인데 굳이 타국에서?

‘이건 좀 어색한 자리가 될 것 같아. 없던 일정을 급히 만들어서 안 된다고 해 볼까?’


공손하게 거절할 만한 답변을 고민하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는 도중 세 명의 단체 톡 창이 떠버렸다. 한발 늦었다. 이제는 거절할 수 없는 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적극적으로 엄마 모임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나오라고 하면 또 순순히 나가는 편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미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운 좋게도 그간 모임에 불러준 엄마들이 전부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학부모에 대한 내 운을 믿고 한 번 만나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 세 명의 아줌마는 아이들을 교실로 밀어 넣고 해변을 걸으며 전망 좋은 카페가 오픈하길 기다렸다. 한국 사장님이 손님을 맞이하는 카페에 한국 엄마들과 나란히 들어서니 내가 사이판에 왔다는 사실이 희미해졌다.


“저희는 여름 방학 때 오고, 좋아서 또 왔어요.”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의 엄마는 역시 유경험자였다. 아이들이 사이판을 참 좋아해서 이번 겨울에는 두 달이나 있다가 간다고 했다.


아! 부럽다. 졌다.

오늘도 내가 가진 행운을 학부모 모임에 많이 가져다 썼다. 등교 첫날 잠깐 보고 오늘 두 번째 본 엄마들은 썩 괜찮은 사람 같았다.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분을 배려한 제법 담백한 대화가 이어졌다. 낯설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타지에서 아줌마 두 명 이상이 모이면 대화 주제가 딱 정해진다.

아이들의 학교생활, 물건이 괜찮은 마트, 주말에 아이들과 가 볼 만한 곳.


내향형 엄마는 며칠간 근처 카페를 전전하며 여행 일기를 쓰기나 했지, 정작 한달살이에 필요한 꿀 같은 정보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이들이 웃으며 하교하고, 마트에 적당히 쓸만한 물건이 있으며, 여행 책자에 나오는 관광지 몇 개만 알아두면 그만이라 여겼다. 너무 무심했을까.

한국에서도 학원 정보 분야에서 꼴등을 달리더니, 밖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많이 얻었다. 귀동냥 한 곳을 모두 가거나, 체험해 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택지가 풍성해졌다. 두 엄마는 자기가 가진 정보를 나누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것처럼 사이판의 많은 정보를 풀어놓았다. 참 고마운 사이판 이웃이다.

한국이었다면 모르고 스칠 인연들이다. 굳이 알았다고 해도 이렇게 유용한 깨알 정보를 나눌 사이는 못 됐을 거다. ‘타국’이라는 배경과 ‘또래를 키우는 엄마’라는 동질감이 도톰한 인연을 만들었다.

5학년인 큰아이는 또 학교 숙제를 잔뜩 받아왔다. 내가 보기에도 수학 숙제는 식은 죽 먹기였지만, 사회가 너무 어려웠다. 학교에서 미국 역사를 배우고 있는데, 숙제가 보통 교과서를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묻더니 오늘은 본문을 읽고 요약하라는 거였다. 아이는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사회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한국 역사도 가물가물한 나 역시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엄마, 파파고로 번역된 거 보고 요약해도 돼요?”


암, 되고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렴.

초등 내내 학교 숙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비록 청강생 신분이지만 수업을 듣는 학생은 선생님과의 약속인 숙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아이는 휴대폰으로 영어 문단을 통째로 찍어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었다. 스스로 숙제를 해낼 방법을 궁리한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름 고심해서 글을 적어나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학교 숙제는 꼭 해가야 하는 거니까. 유려하게 쓴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선생님은 분명 아이의 노력을 눈여겨볼 것이기 때문이다.


9시가 넘은 시간. 오늘을 무사히 마무리한 아이들의 코 고는 소리가 정겹다.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조차 사랑스럽다.

#Decafree Saipan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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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TIP

미국에서는 6, 7, 8학년을 middle school로 규정하기도 해요. 그래서 6학년 이상은 교과 과목의 수와 깊이가 이전 학년과는 많이 달라집니다. 학교생활과 휴양이 적절하게 조화된 한 달 살기를 꿈꾼다면 5학년 이전으로 계획하는 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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