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판 한 달 살기 DAY15

절반이 지나면 생기는 일들

by 최민정

아이들을 등교시켜 놓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복도에서 코를 찌르는 반가운 냄새가 퍼졌다. 김치찌개였다. 냄새가 굉장히 익숙한 걸 보니 한국 김치로 만든 게 틀림없었다. 돼지고기를 넣었는지 냄새가 완벽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웃끼리 안면이라도 좀 틀걸.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종이컵으로 김치찌개 딱 한 컵이면 충분하겠는데……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주방 서랍을 뒤졌다. 컵라면이 하나도 없다. 언제 다 먹었지?


설거지를 끝내고 지갑을 챙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한국 음식을 많이 파는 트윈스 마트를 찍었다. 몸에 고춧가루를 수혈해야 할 시기가 왔다. 매콤한 쫄면이나 얼큰한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지만, 아쉬운 대로 컵라면이라도 먹기로 했다. 한국 라면이 죽 진열된 코너에 들어서니 기분 좋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신라면 큰 컵과 육개장을 담았다.

라면 국물에는 염분이 많아 고혈압 발병률을 높인다고 해 평소에는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벌건 국물을 버리는 건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들었다.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그렇게 컵라면 하나로 한국 음식에 대한 향수를 달랬다.


나는 원래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맛있는 빵집을 발견하면 그렇게 가슴이 벅찰 수가 없었다. 빵 하고 커피만 있으면 평생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청난 오만이었다. 아무리 다양한 잼을 발라 먹어도 빵은 빵이었고, 종류별로 다른 빵을 먹어봐도 결코 밥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한국인의 DNA는 외국에서 강하게 발현되는지,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김치찜을 상상하면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리고 또 하나.

더럽지만, 절실했다.

시원하게 화장실을 다녀온 적이 언제인지 까먹을 정도로 오래됐다. 물갈이하는 건지, 내 몸은 사이판의 음식을 흡수하지 못하는 건지 도통 소화가 되지 않았다. 먹는 족족 배출했다. 몸에 남아 있는 음식이 없으니 계속 배가 고팠다. 미련하게도 그 허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음식물을 몸속으로 욱여넣었다. 빵, 아이들이 먹다 남긴 밥 뭐 그런 것들이었다. 챙겨 온 지사제도 몇 알 남지 않은 상태였다. 행여 밖에서 실수라도 할까 외출 전에는 뭘 많이 먹지도 못했다.

내내 기운이 없었다. 안 그래도 텐션이 낮은 편인데, 아이들에게 힘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역시 나는 한국에서 살 팔자야.’


애먼 사이판 음식들을 탓했다. 편안한 소화라는 걸 반쯤 포기했을 때,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음식이 내 장에 착착 붙은 느낌. 붙어서 에너지로 잘 쓰이는 느낌.

바나나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도넛을 먹어도 몸이 유쾌하게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서야 마음 편히 음식을 먹게 되었다.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낮은 온도와 산소 농도에 적응하는 몸으로 차츰 변하는 것처럼. 석회질 좀 먹고,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빵으로 때우는 환경에 내 몸이 용케 적응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러기 가족은 하지 못하겠구나.’란 확신.


퇴근길 남편은 페이스톡을 한다. 화면 속 배경은 한겨울이다. 아빠의 말소리에 입김이 함께 뿜어 나온다.

초반에 아이들은 아빠에게 조잘조잘 하루의 일과를 읊었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에도 신이 나 재깔거렸다. 하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걸려 오는 아빠의 페이스톡에 아이들의 반응이 점점 시들시들해졌다.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이 멀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내가 다 서운했다. 그런 변화를 남편이 알아채지 못했으면 했다.

기분 탓인지 화면 속 남편의 얼굴이 점점 핼쑥해졌다. 마트에서 조리된 반찬과 레토르트 국을 사다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혼자라서 보일러도 맘껏 틀지 못하고 춥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있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진수성찬을 차려 주는 건 아니지만, 그냥 따뜻한 국에 밑반찬만 줘도 잘 먹는 사람이다. 아이들 수다를 반찬 삼아 한 그릇 뚝딱 비워내는 사람이다.

워낙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라 웃는 얼굴로 통화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그리운지, 우리가 돌아갈 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이 간다. 가족이 전부인 사람이다.


어제 바다에서 나온 큰아이가 말했다.


“아빠 회사를 사이판에 옮겨 놓을 수 있는 초능력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사이판에 살고 싶대도, 그럴만한 여건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아빠와 따로 사는 건 안 되겠다. 아빠의 행복도 아이들의 경험만큼이나 중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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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TIP

마트에 한국 음식을 많이 팔아요. 김, 라면, 햇반, 두부, 된장 등. 괜히 한국에서 무겁게 안 들고 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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