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판 한 달 살기 DAY1

집 떠나면 무슨 고생?

by 최민정

우리 집에 홀로 남을 유일한 생명체.

열대어 구름이, 하늘이에게 인사를 했다.

“아저씨가 올 때까지 딱 일주일만 살아있어 다오.”


1월 초 한겨울 치고는 바람이 매섭지 않았다. 새벽까지 내리던 눈도 우리의 출발 시간에 맞춰 기가 막히게 그쳤다. 게다가 아이들은 오전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새벽부터 벌떡 일어났다. 각자의 캐리어와 배낭을 하나씩 들었다. 4개의 캐리어와 4개의 배낭. 마지막으로 텅 빈 집을 점검했다. 완벽한 준비를 마쳤다.

마치 온 우주가 우리 가족의 여행을 열렬히 응원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륙 후 한 시간쯤 지났을까. 작은 아이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두통을 호소했다. 가끔 두통을 앓는 아인데 미처 배낭에 약을 챙기지 못했다. 비행 중 두통은 계획표에 없었다. 며칠 앓고 있는 코감기 때문일까,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라 멀미를 하나. 다양한 이유를 찾아봐야 하는 건 늘 엄마의 몫이다. 비행기가 고공으로 오를수록 머리 아프다는 말의 주기가 점점 짧아졌다. 아이는 자꾸 내 어깨에 기대고 싶어 했다.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란 심정으로 효과 없는 머리 마사지에만 열을 올렸다. 두통약은 위탁수화물 어딘가에 박혀 있을 텐데……

“아까는 이마 쪽이 아팠는데 지금은 왼쪽 머리가 아파요.”

나이에 비해 의젓한 아이는 많이 지쳐있었다.


내내 작은아이 걱정으로 마음이 무너져 갈 때쯤 큰아이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본인도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두통이 전염병이었나? 두 아이의 손을 한쪽씩 잡았다. 비행기 안에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도착해서 바깥공기 좀 쐬면 차츰 나아질 거야.”란 말은 나를 다독이는 위로였다. 4시간 남짓의 비행시간이 아이들에게는 무리였을까. 지난여름 방학 때 초등학생 남매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분명 너무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했는데…….


‘괜찮아지겠지, 잠깐일 거야.’


기내에서의 억겁의 시간이 지나, 드디어 1년 내내 더운 나라 사이판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빠져나오자 훅 더운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낯선 땅을 밟은 아이들에게도 설레는 훈풍이 불어왔다.

“엄마,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내내 걱정하던 마음이 스륵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그저 건강하고 안전하게만 다녀오자고 다짐한 여행이었다. 큰 사고 없이 지내고 오는 것만으로도 소정의 성과를 얻는다는 생각이었다. (근데 마침 영어 실력까지 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대충 짐 가방을 숙소에 내던지고 가까운 마트부터 찾았다. 당장 먹고 쓸 것을 구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섬 사이판에는 의외로 마트가 다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마트에 들어가 보았다. 사이판에서의 떨리는 첫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채소, 과일 등 식재료는 구색을 제법 갖춘 듯했으나, 품질은 썩 좋지 않아 보였다. 한국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작은 포기상추 3개가 한화로 약 4천 원 정도인 걸 확인하고서는 자꾸 집 앞 재래시장이 떠올랐다. 섬 안에서 자급자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본토나 다른 나라에서 온 물건들이 제법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번 주는 생존을 위해 여러 마트를 탐방하며 괜찮은 물건을 찾아내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갑자기 우리나라의 대형 마트가 그리워진다.

일단 내일 다른 마트에 가 보기로 하고 당장 급한 먹거리(이를테면 쌀, 시리얼과 우유 같은 것)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급한 불은 끈 셈이다. 한 달간 빌린 차의 조수석에 앉아 처음으로 사이판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사이판 번화가인 가라판과는 다소 거리가 먼 리조트였다. 발코니에서 수영장이 보이며, 취사가 가능하고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기에 결정한 곳이었다.

숙소 위치가 좋았다. 사이판 남부의 경치는 나 같은 촌사람의 정서와 잘 맞았다. 질서 없이 자란 다종다양한 나무들과 듬성듬성 보이는 낡고 낮은 건물들. 흐릿한 차선을 달리는 어쩐지 좀 오래된 것 같은 차들까지. 무엇보다 공항, 마트와 숙소에서 만난 사이판 사람들의 말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내 표정(주로 what?)을 가만히 읽고 천천히 내뱉는 영어에는 정감이 묻어났다. 네가 무슨 영어를 하든 내가 어떻게든 이해해 보겠다는 너그러운 얼굴들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한국에서도 즐겨 찾던 서브웨이에 들어갔다. 채소를 고르며,

“No spicy food.”

그들의 선한 웃음 덕분에 완전한 문장을 구사했다. 이만하면 잘했다.

사람들의 여유 있는 미소에 겨우 사이판에 정을 붙이려던 찰나,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의 현실을 여과 없이 말해주었다.

“엄마 물에서 썩은 달걀 냄새가 나요.”

석회질이 많이 섞인 물에서는 진짜 고린내가 났다. 하지만 아이들 말에 동조하면 여행 초반부터 사기가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난 이번 여행의 총책임자이고 나를 믿고 따라온 여행객들을 안심시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얘들아, 지내다 보면 금방 적응될 거야.”

늘 그랬다. 아이들은 내 생각보다 낯선 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어려움이 있을 때도 곧잘 헤쳐나가고는 했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처음 가 보는 미국 학교가 어색해 며칠 손톱을 뜯을지도 모르겠으나 시간이 흐르면 하교 후 재미난 일들을 조잘댈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멘.


여행 첫날의 일정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이번에는 내게 두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타이레놀을 두통이나 챙겨 온 완전무결한 계획형 인간이니까. 그리고 타이레놀보다 신통한 남편도 챙겨 왔다. 갑작스레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대신 말해줄 것이고, 주차가 힘들면 사방을 보며 코치해 줄 든든한 조력자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전에 가장이 도울 수 있는 모든 일들을 끝낼 작정이다.


정말 잘할 수 있을까?

발코니 창에 서 있던 남편이 손짓했다. 펑펑 소리와 함께 사이판 밤하늘에 귀여운 불꽃이 번졌다. 긍정의 의미이길 바랐다.


#Paradiso Resort & Spa


*소소한 TIP

미국은 자연식품 빼고는 대체로 많이 짜요. (치즈, 햄 등) 아이들을 위한 음식은 채소나 생고기 위주로 준비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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