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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프레너 Nov 01. 2023

은행잎 보러 150킬로 : 어느 로컬탐험가의 하루

슬기로운 퇴사생활

시작은 별그램 릴스였다. 좁은 길에 노란 은행잎으로 깔리고 양옆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는 길을 보았다. 이런 은행잎은 바로 보러 가지 않으면 다 떨어지고 말 것이다. 브런치에 ‘바보야, 문제는 실천이야’라는 글을 포스팅하고 바로 본 화면이라 ‘그래 여기 가야겠어!’라는 결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집에서 44Km 떨어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지산리에 있다. 일단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길을 나섰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청주로 향하는 길은 오전 10시가 지난 시점이라 출근하는 차량도 없었고 한가했다. 청주로 가는 길의 가로수는 어찌나 그렇게 다 멋진지. 가로수길에만 가로수가 멋진 것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달리며 휴대폰을 꺼내 신호에 걸릴 때마다 찍었다.

내가 만약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다면 44Km 떨어져 있다고 안 가 보지 않을 것이다. 파리에서 몽생미셸까지 거리가 450Km이다. 왕복투어라면 900Km이지만 파리에서 새벽에 버스를 타고 몽생미셸까지 가는 여행은 인기가 좋다. 지난번 프랑스 일주를 할 때 첫 번째 코스가 몽생미셸이라서 새벽부터 버스를 타고 가 본 적도 있다. 그런데 고작 1/10인 44km 정도야 우습지, (혼자라는 것이 좀 문제가 되지만)

지난 토요일에는 저녁에 콘서트 일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편도 90km쯤 되는 속리산 법주사를 다녀온 적도 있는데 고작 44Km에 망설일 필요는 없다. 보겠다는 대상이 몽생미셸도 법주사도 아닌 고작 은행잎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까.

아무튼 목적지에 도착하니 주차장도 랜드마크도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주변에 공사를 하고 있어서 차를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 4Km나 더 가다가 되돌아왔다. 마침 길 건너편 주유소 옆에 공터가 조금 있길래 차를 세워놓고 500m가량 걸어서 은행나무가 늘어선 포토존으로 갔다. 길에는 보도가 따로 깔려 있지 않아서 차들이 씽씽 내 옆으로 지나갔다. 그래도 은행잎을 보겠다는 일념(사실 40분이나 달려왔다는 것이 더 컸지만)으로 은행나무들 사이로 다가갔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단체로 와서 졸업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쪽에도 은행잎만 두고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양쪽에서 자리를 잡고 독사진, 그룹사진 단체사진을 찍어댔다. 까만 옷에 흰 카라가 달린 옛날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내가 지나가는 것조차 폐가 되는 것 같고 아이들을 함부로 피사체에 놓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서 머뭇머뭇 거리며 은행잎 가득한 하늘이나 바닥을 찍었다. 그래도 물론 거기까지 간 보람이 있었다. 온통 노랗게 물든 가을사진을 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곳까지 간 것이 아쉬워서 근처 갈만한 곳을 찾다가 미동산 수목원이라는 곳을 발견했다. 오늘 지도를 찾아보기 전까지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수목원이다. 세종시에 국립세종수목원도 있고, 바로 인근에 금강수목원도 있는데 청주에까지 수목원을 찾아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은행잎을 보러 거기까지 가지 않았다면.

미동산 수목원은 지산리에서 7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차로 가는 데는 10분이 걸렸다. 가 보니 꽤 규모가 있는 수목원이었다. 처음엔 욕심을 내서 임도를 따라 걸었다. 탐방코스가 8.5Km 정도라는데 걷자고 나선 길에 그 정도 거리는 우스워보였다. 하지만 그 길이 평지가 아니고 산을 오르는 경사길일 때는 문제가 좀 달랐다. 게다가 난 이미 다음 코스까지 정해놓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산등성이까지는 올라갔지만 도중에 ‘산림자원체험관’이라는 표지판을 보자 경삿길을 급하게 내려왔다.‘오늘은 여기까지’를 외치면서.

산림자원체험관은 목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말에는 개인도 체험할 수 있지만 주중에는 단체만 가능한 것 같았다. 멋스러 원 한식 주택에 반해 이리저리 나무에 관련된 지식을 얻으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발견한 숲 속도서관은 정말 마음에 드는 정감 있는 곳이었다. 노트북이 있었더라면 그곳의 나무 책상과 의자에 머무르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텐데 나에겐 휴대폰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숲 속도서관은 구경만 하고 패스했다.

좀 더 걸어 내려오다 보니 난대식물원과 나비생태원이 보인다. 함평나비축제가 생각나서 나비생태원에 들어가 보니 나비는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좀 전에 산등성이를 올라갈 때는 호랑나비와 노랑나비가 보였는데 날씨가 좋으니 나비들이 모두 마실 나간 듯했다.

산림과학박물관과 특별전시인 천연염색 작품을 보고 나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한옥 도서관 카페 후마니타스다. 이곳은 3층 한옥건물에 카페와 인문아카이브 양림이 있는 곳이다. 책이 빼곡히 꽂혀있는 도서관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모습은 나의 로망을 자극해서 사진을 한 번 보고 나서 언젠가 와 봐야지 생각했던 곳이다. 커피와 빵을 사들고 라틴어 책이 있는 곳 앞에 있는 나무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특별히 라틴어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단 그곳이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마니타스’가 라틴어로 ‘이상적 인간’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대 로마철학자 키케로는 문명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후마니타스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 특징을 정리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신, 세련된 삶을 누릴 줄 아는 정신,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공동체의식,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교양과 문화 등 4가지 특성으로 요약된다. (바로 내가 추구하는 삶이다.)

그런 기분 좋은 뜻을 가진 북카페에서 책을 읽고 사진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공주에서 있을 저녁 콘서트를 보러 갈 시간이다. 마침 공주에서 일하고 있는 딸과 저녁을 함께 먹기로 약속해서 딸의 직장으로 향했다.

저녁은 공주 신관동에 있는 밀면과 양꼬치를 파는 목화밀면이라는 곳에서 밀면과 가지튀김을 시켰다. 원래 가지튀김은 가지 사이에 고기나 새우를 다져 넣고 튀기거나 어향가지라 해서 중국식 양념으로 버무리는데 이곳의 가지튀김은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 가지튀김이었다. 보라색 껍질을 모두 깎아내고 튀겨놓으니 고구마튀김과 같은 모양새였지만 맛은 무척 좋았다.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딸과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고 나니 어느덧 예약해 놓은 공연시간이다. 그래서 바쁘게 공주문예회관으로 가서 공주시충남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제2번과 드보르작 교향곡 제8번을 들었다. 요즘은 이렇게 음악 전 곡을 감상하는 것이 짧은 소곡을 몇 곡 듣는 것보다 좋다. 악기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드는 것도 재미있고 작곡가의 감성에 한동안 푹 빠져 있는 것도 좋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음악감상을 적고, 하루 여정을 적으며 10월을 마무리했다. 그러다 11월 첫날의 한 시간을 더 써버렸다. 하루에 세종에서 청주로, 공주로 충남 충북 세종을 오고 간 것이다. 움직인 거리만 150Km가 넘는다.

‘집에서 한 달 살기’를 하겠다고 여행지에서 살 듯 하루를 살아낸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떠나지만 않았을 뿐 구경하고, 맛보고 경험하는 것에 진심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로컬여행도 자세히 다녀보면 구석구석 보물 같은 장소가 숨겨져 있다. 이런 보물 찾기를 하는 것이 로컬탐험가의 본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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