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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mlico Sep 22. 2022

9월의 짧은 생각들 모음

공간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들

#1 인구감소 시대, 넷플릭스와 도시의 구독자


넷플릭스에 한 달 만원 정도의 돈을 내고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이 투자된 영화나 드라마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참 놀랍다. 190여 개국에 2억여 명의 유료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지불하는 세계화된 규모의 경제와 네트워크화된 정보화(온라인 결제시스템) 덕분이다. 도시에서의 삶도 그렇다. 건설비와 운영비에 수십조 원이 투자된 지하철을 단돈 몇천 원을 내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건 도시민의 특권이다.


도시에서의 거주만으로도 굉장히 비싼 공공 서비스(의료, 교통, 교육, 문화, 복지, 방재, 국방 등)를 아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국가 주도로 세금을 통해 도시의 집적된 인프라를 "공동구매"하여 막강한 효과성 및 효율성을 창출해낸다. 주택 가격이 도시근로자의 연간 중간소득의 20배 가까이 올라도 도시를 떠나기 힘든 이유는 직업뿐만이 아니라 이처럼 누리는 혜택이 농어촌지역과 비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global cities 규모의 대도시가 제공하는 자본의 혜택은 속된 말로 넘사벽이다.


도시(都市)라는 단어는 한자로 도성과 시장을 의미하며 과거에는 "성벽"을 통한 안전과 "시장"을 통한 경제를 보장하는 공동체였다. 18세기 이후로 산업혁명에 의한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현대 도시의 기능과 범위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 및 발전되었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오래전부터 도시라는 공공 서비스를 아주 저렴하게 구독(+좋아요)하며 거대한 혜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넷플릭스는 11년 만에 회원수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광고를 포함하는 저가형 서비스와 게임 등을 출시하여 구조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구독자(인구)가 줄어든다면 과거의 논리와 시스템만으로는 더 이상 도시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렵다. 도시도 줄어드는 구독자에 대응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2 도시근로자들이 돈을 모을 수 없는 이유


이 그래프가 현대 자본주의의 결과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70년대 후반 이후로 늘어나는 산업생산(252.9%)만큼 근로자들의 경제적 보상(115.6%)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 즉, 산업생산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제대로 근로자들에게 분배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임금을 제외한 생산이익은 어디로 가는가? 생산자본을 소유한 상위 1~10% 정도의 상류층에 잉여가치는 대부분 흡수되고 이것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혹은 부동산 금융파생상품)에 투자된다. 그리고 다시 부동산 임대수익(혹은 금융이자)을 통해 그나마 부족하게 분배되었던 근로자들의 노동 수익을 빨아드린다. 팬데믹이 오든 인플레이션이 오든 부동산 금융수익은 꾸준히 작동한다.


신자유주의 아래에서의 자본주의는 월급을 받는 일반 근로자들이 "절대" 돈을 모을 수가 없는 구조다. 늘어나는 생산 수익이 노동 수익으로 제대로 분배되지 않으면서 정체된 근로자들의 수익에 비해 잉여가치는 부동산 가격을 지속적으로 높여 연간노동수익(중간값)과 20배 가까이 차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런던 켄싱턴과 첼시 지역의 부동산은 영국인 평균 근로소득의 36.5배에 달한다. 게다가 주택을 사기 위한 대출은 이자를 통해 노동 수익의 일부를 다시 은행으로 흡수시킨다.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도시근로자들은 주식, 코인 같은 고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단기투자로 몰리게 되는데, 이런 개미들의 무모하고 공격적인 단타 투자는 다시 상류층 소유의 생산자본에 흘러들어가 그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런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계속적으로 부자들을 감세하고 노동수익과 생산수익의 격차를 용인한다면, 아무리 민간투자가 활성화되어 경제가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는 도시공간의 불균형과 쇠퇴를 의미한다.

*그래프 출처: Chomsky, N. & Waterstone, M (2021) Consequences of Capitalism. UK: Penguin Books.




#3 도시재생은 시간이 아닌 생산과 분배의 문제다


도시재생이 필요할 정도의 대규모 도시쇠퇴가 발생하는 이유는 "시간(노후화)"이 아닌 "생산"과 관련된다. 도시가 오래되면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쇠퇴가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시의 생산 및 분배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면 각자의 주택소유자가 자력으로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역단위에서 총생산량이 줄고 잉여가치 분배가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개인단위로 이루어지던 주택에 대한 투자는 사라지고 일부 일자리를 잃은 거주자들은 지역을 떠남으로써 대규모의 공실과 쇠퇴가 진행되게 된다.  


영국에서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은 시기는 80년대 이후의 탈산업화 시기였다. 당연히 맨체스터, 셰필드, 버밍엄 같은 공업도시들의 타격이 가장 컸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문제들이 발생하긴 했었지만, 이후 수세기 동안 영국의 오래된 도시들은 점진적인 주택 수선과 지방정부 주도의 기반시설 정비를 통해 유지관리되어 오고 있었다. 산업생산에서 발생한 잉여가치가 개인주택 투자와 공공서비스(council house 같은 지방정부 주도의 공공임대주택 포함)를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된 배경에는 세계정세의 변화와 함께 영국 내부로 불어닥친 급격한 제조업 쇠퇴, 대량해고, 인플레이션, 에너지 위기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재생은 시간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되면 현재의 아파트 재개발처럼 오래된 도시환경을 끊임없이 교체해야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경사지에 무계획적인 난개발로 생겨난 일부 지역을 제외한다면, 환경정비보다는 생산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걸 알면서도 빠른 시간 안에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는 건조 환경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이해가 되긴 하지만 공공재정을 무한정 투입해도 생산 및 분배에 대한 개선 없이는 도시재생이 완성되기는 불가능하다.


건조환경의 재개발을 통해 개선하는 도시재생사업의 경우, 건설도 일종의 산업생산이기 때문에 분명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건설이 완료되면 효과는 이어지기 힘들다. 시간(노후)과 환경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일시적인 절반의 도시재생밖에 될 수 없다.




#4 우리는 왜 국가주도 사업에 강하고 지역주도 사업에는 약한가?


유럽이나 일본은 전통적으로 봉건제 사회였기 때문에 군주가 신뢰하는 신하들을 지방의 영주로서 다스릴 수 있도록 땅(royal estates)을 하사했다. 군주가 세세한 지역 관리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국력이 강해지고 신하들이 늘어날수록 이들에게 보상해야 할 토지는 더 필요해지게 되면서 정복전쟁은 필수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산업 생산량 증가)을 해야 하듯 봉건제 사회는 끊임없이 전쟁을 통해 영토를 빼앗아 확장해야 국가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이 전국시대 내전(센고쿠 시대) 이후에 일으킨 임진왜란이 대표적이다. 이백 년 넘게 영주들끼리 싸워오면서 전투자원(사무라이, 군 조직 등)이 너무 비대해졌고 전국 통일로 전투의 명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국제전이 필요했다. 흥미롭게도 조선을 침공한 일본의 영주 연합군은 내부 경쟁으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시하는 통합작전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영주간 경쟁으로 인해 유리한 정보만 작전본부가 있는 오사카성으로 전달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판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선이 정복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오랜 시간 국경을 마주한 중국과 평화로운 관계 유지도 있었지만 강한 중앙집권화 국가였기에 봉건제와 달리 영주들을 위한 새로운 영토확장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넓은 영토는 중앙권력의 관리 부담(특히 국경지대의 수비)을 증가시킨다.


우리가 임진왜란과 동학농민운동 때 의병을 일으키고, 민주화운동을 하고, IMF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하고, 촛불집회로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킬 수 있었던 이유도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을 오랜 시간 경험하면서 지역이 아닌 국가단위의 국민 통합과 대응(소위 국난극복)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을만들기나 시민단체활동 같은 작은 지역단위의 대응에 약한 이유도 중앙집권화된 역사 때문이다.


영국이나 일본이 작은 커뮤니티 단위의 도시재생사업에 강한 이유도 과거의 봉건제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지방의 영주(lord/land owner) 주도의 마을 재개발사업(village redevelopment)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었다. 산업혁명 이후 수백 년간 지역 간 이동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탈산업화와 도시 쇠퇴 이후에도 수세대에 걸쳐 지역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지역주민이 뮤지엄 운영 같은 도시재생사업에 활발하게 참여해왔다.


정치적으로도 현재 영국과 일본이 의원내각제이고 우리가 대통령제인 이유도 동일하다. 예를 들어 에도시대의 일본은 실질 군사력을 일왕이 아닌 영주들(현재 국회의원 역할)의 리더인 쇼군(현재 총리 역할)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실시해왔던 영국과 함께 현재까지도 군주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또한 영국의 런던 중앙정부 권력이 여전히 막강하긴 하지만 시스템적으로 지방분권에 대한 지방도시들의 준비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속도에 대한 갈등은 있지만 비교적 분권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5 자본주의 도시공간의 이해: 가치, 차이, 갈등


가치는 차이에 의해 발생한다. 인간은 가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을 가지기 때문에 타인과의 차이를 구별 짓는 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회(특히 종교)는 특권층을 제외한 모두의 이타적 평등을 강조한다. 평등은 차이를 약화시키는 반면 개인은 가치가 사라지는 것에 강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이 둘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갈등은 차이의 인정에 대한 개인 간 입장 차이에 의해 발생하며, 사회규범(+종교교리)은 평등과 차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 갈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물론 사회규범과 종교 교리의 정확한 역할은 부족한 자원의 적절한 분배를 위한 사회적 질서유지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도시 속 갈등은 서로 간에 원하는 차이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근간에는 경제 공동체가 차이(inequality)를 인정하느냐 혹은 공유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누군가는 차이를 긍정으로 또 누군가는 부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개인은 차이가 만들어내는 가치에 대해 무한의 소유욕을 가지기 때문에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도시의 불균등 격차와 공간 변화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봉건주의는 차이를 고정된 계급과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권력으로 정당화시켰지만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영역에서 민주적/집합적/일시적 타협에 맡기기 때문에 가치를 물리적으로 실현시키는 자본축적은 도시공간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즉, 자본주의 도시공간은 불균형의 격차와 사회적 갈등이 발생시키는 역동적인 가치의 변화를 동력 삼아 유지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도시는 그 존재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6 탈오징어게임: 시장의 룰은 바뀌고 있다


과거의 산업사회는 포디즘(Fordism)으로 대표되는 소품종 대량생산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소득분배 역시 상위의 엘리트층부터 노동자 계층까지 일괄적으로 차등 배분되었다. 생산과 소비의 종류가 단순했기 때문에 매뉴얼을 잘 외워서 시험을 잘 보고 관리자가 되어 성과를 잘 내어 1등을 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소득을 받게 됨을 의미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복잡 다양해진 소비 중심의 사회다. 전체적인 생산의 파이는 커졌지만 굉장히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의 수요로 인한 파편화된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러한 새로운 생산체계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으로 정의했다. 가치 창출의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대기업이나 공무원 조직 같은 수직적인 위계 조직을 제외하고, 산업 전반에서 소득의 단순한 차등 분배 시스템은 약해지고 다양해진 소비패턴을 만족시킬 분야의 최고들에게 수익이 파편적으로 분산 및 집중되는 세포화된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비주류의 문화라도 분야를 리드하는 기업이나 개인은 높은 수익이 보장된다. 예를 들어 인터넷 미디어들이 파편적으로 정보를 생산하는 가운에 티비 공중파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것이 더 이상 최고의 가수로서 지위와 수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공중파에 한번도 등장하지 못했던 힙합 레이블이 굉장한 수익을 창출하고 BTS는 온라인을 발판으로 세계적 인기를 얻게 됐다.


과거 거의 유일한 문화/정보 생산자였던 티비의 독점적 지위가 깨졌기 때문이다. 비주류의 파편적인 인기를 얻어 샐럽이 되면 반대로 공중파에서 모셔가고 있는 상황이다(오징어게임도 티비가 아닌 온라인 플랫폼에서 제작되었다). 어쩌면 새로운 장인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오일남 오영수 배우님의 발언은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었겠지만 굉장한 통찰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대량생산 시스템에서는 부의 분배가 일괄적인 임금과 세금을 통해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있었지만 현재는 글로벌 시장 아래에서 경우의 수가 너무 다양해져 국가가 정책으로 개입할 여지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7 드라마 수리남 속 무장소성과 편견적 이미지


인간은 이미 한번 강하게 형성된 공간에 대한 편견적인 이미지를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촬영의 제한이 있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은 이러한 편견적 이미지와 상징을 잘 활용하여 해외촬영의 공백을 메꾸고 있다.


윤종빈 감독은 남미의 차이나타운이 너무 현대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60년대 쿠바 차이나타운을 모델로 세트장을 새로 만들었다고 밝혔다. 낡고 허름한 건물 전면에 중국식 붉은색 고풍스러운 장식들은 차이나타운의 시각적 편견을 강하게 실현시킨다. 브라질 국경지대의 정글씬도 제주도에서 촬영되었는데 정작 남미에는 정글을 상징하는 야자수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제주도가 우리가 상상하는 정글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전요한 목사의 저택 내부는 한국 용인의 한 실버타운 상가건물이었다. 이미 현대의 공간은 지역적 맥락에서 분리된 이국적이고 독특한 authenticity의 공간적 연출로 뒤덮여있다. 실버타운이라는 공간도 은퇴한 노인들의 제2의 인생을 위해 마치 여행을 온 듯한 인상을 주는 유럽, 남미, 동남아 리조트들의 비일상적이고 판타지적 이미지가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영화나 광고에서 본듯한 외국 같은 곳... 이런 의도적인 무장소성이 현대 소비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8 분할소비 전략: 중요한 것은 생산이 아닌 소비의 속도다


Neil Postman(1984)의 책, Amusing Ourselves to Death에 의하면 약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4시간이 넘는 토론은 다반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의 유일한 오락거리는 신문, 잡지, 소설 같은 서적이었고 유통구조도 지금보다 훨씬 느리고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득하게 앉아서 오랜 시간 독서를 즐겼었다. 따라서 장편소설에 대한 수요도 높았다.


디지털 시대에는 세계 곳곳에서 소비할 콘텐츠가 초, 분 단위로 쏟아진다. 요즘 소셜미디어에서 흔하게 보이는 직업이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유튜브에 영상을 하나 올려도 쉽게 크리에이터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유튜브로부터 실버버튼(구독자 10만 이상) 정도는 받아야 광고도 붙고 직업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현재 산업의 전략적 초점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소비를 많이 그리고 빠르게 시키느냐에 달려있다. 과거 대량생산 시스템이 적용된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자가용의 보급과 함께 빨리 상품을 만들어내어 차에 태워 보내는 노력을 기울였었다. 하지만 현재는 온라인 플랫폼(배달/택배 포함)을 통해 정교하게 개개인에게 상품의 배송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얼마나 다양하게 소비층의 욕구를 충족시켜 소비를 이끌어내느냐에 달려있다.


결론적으로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소비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속도도 중요하지만 소비속도가 더 중요해진다. 생산속도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개인 크리에이터/개인사업자들을 통해 공백을 줄일 수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유통속도와 소비속도가 포화상태에 이른다면 그 다음에는 소비할 양을 줄여 (정확히는 소비할 양을 분할하여) 맛보기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짧은 분할소비는 경제적 지출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소비에 대한 쾌감을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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