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반에 민준이의 장애를 의심하고 처음 발달 검사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지적장애'이며 '경계선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폐성 장애에 대해 내가 잘 몰랐던 부분들이 있어서 자폐성 장애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살펴보니 지적장애와는 다른 민준이의 뚜렷한 자폐성향을 나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준이는 5학년 때 다시 받은 발달검사에서 자폐성 장애로 진단명을 바꾸어 받았다.
또한 나이를 먹어갈수록 지적 수준도 또래 아이들과 차이가 많이 나게 되어 현재는 전혀 경계선 수준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6살에 병원에서 받은 발달검사상 민준이의 지능은 68, 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인 지능 70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치료를 받고 '조금' 노력하면 경계의 지능이 정상 범주로 올라갈 수 있을 걸로 기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순진한 생각이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던 4살 하반기 6개월을 보내고, 조금 정신을 차린 5살부터 7살 여름까지 언어와 인지치료를 중심으로 음악치료, 놀이치료, 미술치료 등 각종 수업을 꾸준히 받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이는 좋아지지 않았고, 다른 한편 나에게 조심스럽게 민준이와 보통 아이들의 차이가 점차 커질 거라고 경고했던 몇몇 사람들의 말이 맞다는 걸 나도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능력이나 한글, 셈하기를 비롯한 인지는 아무리 가르쳐도 별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민준이는 단기 기억(일시적으로 저장되었다 사라지는 기억)이 짧고 장기기억(기억 고정을 거쳐 오래 남아있는 기억)이 좋은 편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좀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단기 기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1 더하기 1은 2'라는 걸 수십 번 반복하고 금방 다시 물어봐도 '1 더하기 1은 1'이라고 대답하는 통에 나는 깊고 깊은 절망 속에 빠지곤 하였다.
학교 입학을 한 해 앞둔 7살. 여러모로 마음이 조급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이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을지, 언제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되었다. 한편, 민준이의 발달 수준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사랑받는 아이였으면 하는 욕심을 나는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준이의 인지 수준을 보니 공부 잘하고, 발표 잘해서 선생님께 이쁨 받기는 애당초 그른 일이었다.
일반학교와 특수학교 중 어디로 보낼 것인지 그리고 유예를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과 별개로 선생님들께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다른 아이들을 보았을 때 어떤 아이가 이쁜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에게 이뻐 보이는 아이 중 하나는 '인사를 잘하는 아이'였다. '인사하기'는 이해력이나 인지보다는 왠지 가르치기가 더 나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민준이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인사하기'는 꼭 잘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민준이가 8살 되던 해에 오랫동안 살던 서울 광진구를 떠나 양천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가 이사했던 아파트는 지은 지 2년밖에 안된 신축 아파트였다. 이사 첫날 이삿짐센터에서 짐을 정리하며 박스들을 통로에 두었는데 이사가 채 끝나지도 않은 오후 3시에 옆집 할머니로부터 '지저분하니 당장에 치우라'라고 야단을 맞았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아이들이 밖에서 타고 놀다 18층 우리 집까지 가지고 온 자전거에 묻어있던 흙이 엘리베이터 앞에 떨어져 있었는데 '이 흙이 신발에 묻어서 우리 집(할머니 댁) 현관을 지저분하게 한다'며 빨리 청소하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가뜩이나 민준이의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던 시절이었는데 옆집 할머니까지 깐깐한 분을 만나 나는 마음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할머니에게 뭐 하나 걸리지 않게 조심하며 오다가다 마주칠 때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숨기며 반갑게 인사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인사하기가 아직 몸에 배지 않아 멀뚱멀뚱 쳐다 보기만 일쑤였던 아이들도 뒤통수를 꾹꾹 눌러가며 인사를하라고 시켰다.
옆집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 매일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모여 수다를 떨거나 식재료들을 가지고 나와 다듬곤 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 슈퍼라도 가게 되면 나가면서 만나고, 들어오면서 만나는 격이었는데 하루에 몇 번을 맞닥뜨려도 그때마다 나도 인사하고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하라고 시켰다.
그곳에서 2년을 살고 남편의 직장이 판교로 오면서 우리도 성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가 결정되고 나서 옆집 할머니께 이사 이야기를 전했는데 할머니의 말씀이 아주 놀라웠다.
"아유, 새댁~ 새댁 참 좋았는데 2년 만에 이사 가니 정말 아쉽네. 아이들도 참 이뻤는데... 어찌 그리 인사를 잘하는지, 하루에 몇 번을 만나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인사해줘서 내가 참 고마웠어."
난생처음 보는 깐깐함을 자랑하던 이 할머니의 마음이 언제 이렇게 부드러워졌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때는 살림도 손에 익지 않고 요리도 서툰 초보 주부 시절이라 내가 한 음식을 갖다 드리고 할 주제도 아니었고, 좋은 걸 사다가 선물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다. 2년 동안 내가 한 거라곤 오로지 '인사'밖에 없었다. 나는 이 할머니를 통해 '인사'에는 돈 안 들이고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큰 위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인사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일에 더욱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의 뒤통수 누르기로 얼떨결에 인사를 했던 민준이는 초등 저학년을 지나면서부터 스스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멀리서부터 뛰어가거나 손을 잡고 흔들며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는데, 그 표현이 너무 과해서 어떤 사람은 깜짝 놀라기도 하고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민준이의 이런 면에 대해 내가 양해를 구하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민준이만큼 자신을 반겨주는 이가 없다며 그래서 고맙다고 말해주기도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민준이는 낯선 사람들에게도 자주 인사를 건네서 이상한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아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인사하는 게 아니라고 무수히 많이 가르치고 주의를 주곤 하였다. 그러나 민준이는 중학교 때 청소년수련관 방과 후 수업에 다니고부터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대담함이 오히려 더 커져 버렸다. 수련관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면서 방과 후 수업에 봉사자나 외부 선생님들도 다양하게 오곤 하였는데 낯선 사람들도 인사를 잘 받아주고 칭찬을 해주니 강화가 된 모양이었다.
민준이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할 때 옆에서 보면 중년 아줌마, 아저씨들은 당황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대부분 받아주는 편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정말 이쁘다'라고 큰소리로 칭찬하며 인사를 받아주시지만, 20대 여성들 같은 경우는 놀라서 도망을 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도 민준이는 낯선 사람이든 아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인사를 '너무' 잘한다. 그래서 학교나 복지관, 동네에서 "아~ 그 인사 잘하는 애?" 하면 통하는 아이가 되었다.
학교에서 혼자 집에 오는 것을 연습시키며 내가 몰래 차로 뒤따르면서 살펴보니 걸어오는 길에 주차되어 있는 장애인 택시 기사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는데 아저씨가 여간 반갑게 인사를 받는 게 아니었다. 또한 근처 빌라 경비실에도 일부러 들러 인사를 전하는데 경비 아저씨와 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하루 이틀 안부를 나눈 사이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혼자 기막혀하며 웃었다.
엄마인 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민준이의 인사는 아직 여러모로 어설프고 걱정스러운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 민준이의 인사는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큰 장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선생님들께 사랑받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나의 바람대로 민준이는 인사를 잘해서 선생님들께 정말 사랑받았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 또한 대화가 서투른 민준이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데 '인사'를 사용하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내가 했던 작은 생각은 생각지 못한 결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