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은 짧지만 감사하다
2020년 10월, 전공과 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전공과는 다니던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를 지원할 수도 있어서 잠시 고민을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가깝고, 아이에게 익숙한 곳이기에 민준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전공과에 원서를 냈다.
전공과 시험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이런저런 기능시험 과제들과 면접 예상 질문들을 뽑아서 아이들에게 모의시험을 보곤 하였다. 전형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담임선생님과 통화하면서 모의시험 때 민준이의 반응이 어떤지를 여쭤보았는데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어머니, 민준이는 같은 질문을 매번 하는데도 외워서 하는 대답이 아니고, 조금씩 달라요. 그리고 리스트에 없는 질문을 해도 당황은 하지만 모르면 모른다고 대답을 하고, 맞든 틀리든 자기 나름의 대답을 하기 때문에 대화가 계속 이어지더라고요"
"모른다는 대답은 어차피 정답이 아니니까 점수를 못 받는 거 아니에요?" 하고 다시 여쭤보니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가장 나쁜 것은 '무응답'이에요"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아이는 이후 점점 대답이 논리적으로 변해갔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보통 아이들보다 많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해가 갈수록 좋아지더니 초등 고학년쯤에는 정말 멀쩡해져서 성적도 상위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그때 당시 민준이는 어땠을까? 선생님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었다. '몰라요,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조언이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무응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방법을 알 수 없어서 나는 참 답답하고 속상했었다.
그러다 '몰라요'라는 대답을 언제부턴가 집에서 하기 시작했었다(시기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 고학년쯤부터였나 싶다). 그래도 외부에서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 길이 없었는데 담임선생님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니 감사했다. 이 녀석이 이제는 뭐든 대답을 한다니, 그래서 어찌 되었든 대화가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니... 7살 때 기대했던 그것을 20살에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기뻤다.
시험 당일날. 어쨌든 이것도 입시라고 내가 마음이 다 떨렸다. 아이들은 본관 로비 들어가기 전에 시험 순서를 정하는 공을 뽑게 되어 있었다. 노란 공 중 하나를 고르고 속에 든 번호를 확인하는데 이런^^;;; 20번이다. 자립생활학과에 지원한 아이들이 총 20명이라고 했으니 마지막 번호다. 담임 선생님께서 5~6번쯤이면 좋겠다 하셨고, 너무 뒷번호만 안 뽑으면 된다 하셨는데 하필 마지막 번호를 뽑았다. 긴 시간을 기다리며 막상 시험장에 들어가야 할 시점에는 긴장감도 다 풀어지고, 산만한 상태로 시험을 보게 되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코로나로 외부인들은 학교에 출입을 못하게 된 상황이지만 원래도 전공과 시험에는 어머니들은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학교 현관문 앞에만 데려다주고 전형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도 내 순서가 끝났다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마지막 번호의 친구가 끝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는데(이것은 학교마다 다르긴 하다) 대기실 상황도 녹화가 되고 혹시라도 문제가 될만한 것이 없는지를 검토한다 하니 이래저래 걱정이었다.
1시 전에 들어간 아이들이 4시가 다 되어서야 나왔다. 많이 힘들었을 것도 같은데 민준이 표정은 밝았다.
"민준아, 시험 잘 봤어?"
"네!!!"
"무슨 시험 봤어?"
"빨간색, 분홍색 맞추고.... "
"그래? 그리고 또 뭐 했어?"
"몰라요"
민준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같은 색깔 맞추는 문제 같은 게 나왔나 보다고 대충 짐작은 하지만 정확하지 않고 그 외 다른 문제는 뭐가 나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자립생활학과에 지원한 친구들 중 전달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도 한 두 명은 있지만 이미 시험 다 끝났는데 문제 알면 뭐하겠냐 싶어 굳이 전화해서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래서 전공과 시험은 족보도 없고, 보안이 철저하게 지켜진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아침, 떨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자꾸만 내 마음을 내려놓는 작업을 했다. 발표시각은 오후 1시, 시간에 맞춰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을 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각 1시에 문자가 딱 날아왔다.
강민준 님은 전공과 자립생활학과 전형에 합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거의 동시에 전화벨도 울렸다. 누구누구 합격했더라, 누구는 안됐더라... 같은 학교 친구 엄마가 다른 친구들 소식도 전해준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와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의 아이들은 다 불합격하고 민준이만 합격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발표 당일 난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주느라 바빴다. 사실 전공과에 간다고 해서 보장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학교생활이 2년 더 연장된다는 거, 졸업 후 갈 곳을 서둘러 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뿐이었다. 2년 뒤에는 전공과에 불합격한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을 하고, 아마도 똑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며 사람들을 위로하다 보니 나는 마음이 들뜨기보다는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