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애독가가 되려면
오늘 정리해보니, 20대 초반 5년 동안 12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실리콘 밸리 관련 저서, 유명한 창업자의 자서전, 인문학, 정치, 철학, 심리학 책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왜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탱이인가?
나는 책을 사랑하며,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책은 나에게 도피처일뿐이었다. 세상에 몸을 내던지기 두려워 책 속에 숨었다. 책 속에 숨으면 마치 뭐라도 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책에는 온갖 멋있는 말이 써있다.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의 일대기에는 거창한 비전과 도전 정신이 담겨 있으며, 인문학 저서는 사회에 대한 이상향으로 가득차다. 정치 관련 책은 주로 사회를 비판하며 개탄에 빠진다.
정작 이런 책을 읽는 나는 일상에서 큰 비전은 커녕 작은 생각도 실천하지 않았고, 작은 도전도 해보지 않았다. 그저 인문학 저서가 제시하는 이상향을 등에 없고 도덕적 우월감에 젖어버렸다.
물론 전 세계에서 유례 없는 초저출산율로 곪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다. 또한 당장 내가 한 개인으로서 구체적인 행동에 동참할 수 없더라도 사회 문제에 관심 갖는 태도는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의 동기는 너무나 비겁했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손가락질하며 나를 치켜세우고 싶었을 뿐이다. 대단한 사람들의 대담함으로 나의 자존감을 부풀리고 싶었을 뿐이다.
맨땅에 부딪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뭐라도 해보지 못하는 한심한 나 자신을 그렇게 정당화했다. 불만이 있으면 제기해야 했고 뜻이 있으면 펼쳐야 했다. 궁금증이 있으면 방구석이나 서점의 안락함을 벗어나 현장의 치열함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피부로 느끼며 직접 해소해야 했다.
책은 매뉴얼이 아니다. 특정한 목적에 써먹으려 든다면 이미 독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헛똑똑이가 아닌 현명한 애독가라면 독서를 통해 길러진 생각의 결이 삶에서 슬그머니 드러난다. 회피하는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삶이라면 말이다.
책도 결국 삶과 인간에 관한 것이다. 삶과 맞닿아 있지 않은 독서는 독선(獨善)으로 치달을 뿐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