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블리 어머님, OT를 못 오신다고 하셔서 전화로 연락드려요. 작은 은블리 어린이집 새 담임 선생님이에요. 올해도 음.. 작년과 바뀐 건 거의 없구요, 3월 초 어린이집 적응기간은 따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드렸어요. 첫주는 11~12시, 둘째주는 10~12시 이렇게 원에서 생활할거구요. 점심 급식은 둘째주부터 시작으로...."
"네?? 적응기간이요? 1년 꽉 채워 다녔는데 적응기간이 또 필요한가요?"
"네에~~~ 새로온 친구들도 있고, 재원생들도 교실이랑 선생님이 바뀌고... 또...."
나는 파워 J형 인간이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며 틈틈이 취미 활동까지 할 수 있는 건 촘촘하게 미리 세워놓은 계획들과, 육아와 가사에 진심인 남편, 그리고 함께 거주하며 육아를 도와주시는 친정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휴가 사용이 다소 유연한 직장에 다니고 있으며, 심지어 직주근접이다. 그런 나도 아이를 키우다보면 '진심'으로 '멘붕'이 오는 순간들이 있는데, 어린이집 전화를 받았던 지난 2월 중순의 그 날부터 약 한 달간이 그랬다.
2023년 3월 2일 큰 은블리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난 이미 2022년 12월이 되기 전부터 향후 3~4개월치 아이들 일정과 내 휴가계획, 업무계획 등을 세우고 있었다. 1년치 일정이 미리 나오는 병설유치원과 달리 어린이집 겨울방학, 봄방학 일정은 미리 알기 힘들다는게 영 찜찜했지만, 가족여행을 위한 나와 남편의 휴가 일정까지 이미 1월 중순이 되기 전에 큰 그림이 완성된 터였다 (참고로 남편도 파워 J형 인간이다).
친정엄마가 육아를 도와주신다지만 내년에 칠순인 분께 에너지 넘치는 아이 둘을 종일, 그것도 며칠 연속으로 맡기는 건 못할 짓이다. 그래서 난 둘째 어린이집 겨울방학에 맞춰 1월 초에 일주일, 그리고 첫째 유치원 돌봄교실 종료 후 초등 입학식까지 비는 2월 말-3월 초에 이주일이라는, 상당히 긴 기간의 휴가 일정을 12월에 이미 승인 받아두었다. 정확한 일정은 몰라도 분명 둘째 어린이집 봄방학도 2월말에 있을테고, 겸사겸사 가족여행도 같은 기간으로 맞춰두었다.
그리고 친정엄마가 아이 둘을 동시에 케어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동시에 등하원 시간은 꼬이지 않으면서 친정엄마의 운동시간까지 확보한, 거기에 남편과 나의 재택일정까지 미리 맞춰놓은, 그야말로 분단위까지 고려한 일정표를 만들어 냉장고에 떡하니 붙여놨었다. 방과후 수업을 입학 후에야 신청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만 제외한다면, 나름 깔끔하게 나온 일정표를 보며 뿌듯해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예상치 못한 2주간의 적응기간이란 말인가.
분명 첫째가 다녔던 어린이집에는 없던 학기초 적응기간이었다. 신입생은 그렇다고 치자. 재원생까지 굳이 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하소연해봤지만, 원활한 원 운영과 아이들의 적응을 위해 배려를 부탁한단다. 다들 감사하게도 이해해주시네요... 라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고 "그래도 우리 아이는 정상 등원할게요! 맞벌이의 사정을 배려해주세요"라고 요구하긴 정말 쉽지 않다.
어린이집 입소 대기 신청시 주어지는 가점항목이 있다. 그 중 맞벌이 가정과 두자녀 이상도 포함된다. 그래서 어린이집이 부족한 동네에선 외벌이에 외동아이는 입소 순위가 밀려 입학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나 많다. 우리 동네도 어린이집이 넉넉한 곳은 아니다. 특히나 국공립은 맞벌이에 두자녀인 우리에게도 그림의 떡이다. 아, 첫째가 6살이 되니 순서가 되었다며 연락이 오더라. 그렇다면 분명 우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도 맞벌이 가정이 꽤나 많을텐데, 2월말 1주간의 봄방학에 이어 2주간의 적응기간이라니. 아이는 누가 보고, 직장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다행히(?) 초등학교는 입학식 다음날부터 별도의 적응기간 없이 점심 급식이 포함된 정상 등하원이 바로 시작되었다. 분명 선배맘들이 초등 1학년의 기나긴 적응기간 이야기를 분명 했던 것 같은데 (등교하고 한두시간 뒤면 바로 하교한다며..)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예외인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적응기간이 없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내가 할 일은 예상치 못했던 둘째의 적응기간과 첫째 하교 시간에 맞춰, 할머니의 수고는 최대한 덜면서 아이는 안전한 일과표를 새로 만드는 것. 그것도 무려 세 가지 버전이 필요하다. 하나는 <1호 방과후수업 시작전/학원 + 2호 적응기간>, 또 다른 하나는 <1호 방과후수업 시작후/학원 + 2호 적응기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1호 방과후수업/학원 + 2호 정상등원>의 최종 버전.
그리고 어른도 헷갈려서 냉장고에 붙여 둔 일정표를 매일 확인해야 하는, 무려 2주간 매일 바뀐 뒤에야 확정되는 일정을, 첫째에게 매일 밤마다 그리고 아침 등굣길마다 숙지시키는게 가장 중요했다. 병설유치원을 다니며 익숙한 학교 공간이었고, 학원도 지난 1년간 계속 다니던 곳이었지만, 어느 날은 교문에서 미술학원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또 어느 날은 교실에서 짐 다 챙겨 다른 층 교실로 가서 방과후 수업을 들은 뒤 2층 돌봄교실 앞에서 태권도 선생님을 만나야 하고, 또 다른 날은 태권도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오면 되지만 할머니가 데리러 가는 날도 있고.... 등등.. 어제까지 유치원생이 오늘부터 갑자기 학생 노릇을 하기도 버거운데, 스스로 마음의 준비는 했어도 뒤죽박죽 일정에 아이 나름대로 세계관이 흔들리며 꽤나 힘들었을게다.
어찌저찌 '멘붕'의 기간을 보내고 일정이 확정되니, 이런... 둘째 은블리 코에서 콧물이 주르륵 흐른다. 첫째도 목이 아프단다. 남편과 내가 재택을 최대한 당겨쓰고, 심지어 남편은 하루 휴가도 썼건만, 저녁이면 친정엄마의 체력이 소진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옮았는지 감기 기운도 있고, 어쩌다 삐끗해서 허리도 아프시단다. 출근하기에도, 그렇다고 휴가를 더 쓰기에도 마음 불편한 날들이었다.
여러 조건들이 육아하기 좋은 환경에 있는 나같은 워킹맘도 이럴지언데, 육아 도움을 받을 곳도 없고 직장도 멀고 심지어 야근도 많은 맞벌이 가정은 이 시기를 대체 어떻게 버티는 것일까. 한편에서는 저출생의 심각성을 토로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주69시간 근무제 도입을 이야기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