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쓰고 싶어진 일기
갑자기 떠오른 옛날 추억.
‘나는 왜 이렇게 패기가 넘칠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근력운동이랑 같은 원리인 것 같다. 내 근육이 지탱할 수 있는 기존의 무게보다 더 높은 무게를 도전하고 성공해내면 그 때부터 내 근육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의 기준이 그 만큼 높아진다. 즉 기본값이 달라지는 것.
패기도 마찬가지. 예전같았으면 절대 용기내지 못했을만한 일을 눈 딱 감고 해내고 나면 그때부턴 내 패기가 그만큼 커진다. 이후에 그때와 비슷한 정도의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낸다.
퍼스널 트레이닝을 받으면 2-3개월 동안 근육을 파열하고 아물고 또 다시 파열하고 아무는 과정을 통해 근육의 한계치를 저기 위로 올려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패기는 과거 어느 한 기간 동안 미친 듯이 극대화되었다.
그건 바로, 알리바바에서의 인턴 생활이다.
알리바바에서 인턴을 시작했을 당시 나는 중국어가 유창하지 않았다. 특히 말하는 건 정말 자신이 없었다. 엄청 나대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인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입 닫고 밥만 먹던 시기이다.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게 소위 입을 터는 것(?)인데, 그게 자유롭게 내 뜻대로 안되니 아예 입을 열지 않게 되더라.
그랬던 내가 알리바바 본사가 있는 항주 땅에 뚝 떨어졌다. 무려 3만명이 일하는 본사. 해외 지사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항주 본사는 ‘알리바바 글로벌기업 아니야..?’라는 물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외국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서 인턴으로 살면서 나는 ‘생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찌보면 ‘생존’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나와 경쟁을 하는 상대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도전이고 결투였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결투. 어제보다는 조금 덜 더듬거리고,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완성하고, 어제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상사에게 말을 걸어보는 것. 이게 내 매일 매일의 목표였다.
알리바바는 따뜻한 회사는 아니다. 그 안에서 일하는 한명 한명은 다들 한 가닥하는 인물들이기에 자기일 하기 바쁘다. 웬만하면 먼저 말을 걸지도, 어려움이 없는지 물어봐주지도 않는다. 그러니, 혼자 일을 찾아서 해야하고, 상사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들어야했다.
내가 다닌 대학교, 나의 집안, 나의 스펙, 이 모든 것이 알리바바 안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나의 존재감은 오로지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내가 ‘나대지’ 않으면 사실상 나의 존재감은 ‘무无’에 가깝다.
그래서 그 때부터 얼굴에 철판을 깔기 시작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말하자’, ‘할까 말까 망설일때는 하자’는 정신이 그 때부터 생겼던 것 같다. 어디든 부르지 않아도 가서 일을 달라고 졸랐다.
내가 알리바바에 입사한지 일주일 되던 날, 상사가 처음으로 나를 외부 미팅에 데리고 가 주었다. 중국 어느 식료품 기업이었다. 미팅하는 내내 상사와 상대 기업의 CEO는 열띤 토론을 벌였고, 나는 옆에서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렇게 빠르게 말하니 1/3은 못 알아들은 상태. 하지만, 나는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질문을 하나 던져야 했다. 그것마저 하지 않는다면 내가 이 미팅에 참석해 얻는 것도 0이고, 상사 입장에서 나를 이런 미팅에 데리고 올 이유조차 0이 되어버린다. 회의가 끝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일 시점에 내 속은 이미 ‘끼어들까, 말까..’ 사이의 엄청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냥 입을 열고 내뱉을 껄.
그냥 그렇게 회의는 끝났고, 난 무척 속상했다. 어쩜 한마디도 못하지.
그래도 상사가 착해서 그 다음 미팅에도 나한테 따라오라고 해주었다. 회의 끝날 시점에 마구 내뱉을 의문문 문장을 열댓개는 외워왔으니 이번에는 꼭 끼어들어야해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다 채워놓았는지, 회의 내용이 뭔지는 하나도 귀에 안들어왔다. 그래도 질문을 질문을 두개나 던졌다. 미팅에 참석한 다른 부서의 직원분께서 “오? 쟤 누군가 궁금했는데, 질문도 하네? 누구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질문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미친듯이 행복했던건지, 그녀를 쳐다보고 “나 여기 새로 들어온 인턴이야. 반가워!” 라고 말했다. (참고로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음) 와. 패기 넘쳤다.
어느날, 회사에 갔는데 이메일이 와있었다. 매년 한번 있는 연회에 공연을 준비하고픈 직원은 지원하란다. 그런데 거기 곡 리스트에 한국 노래가 떡하니 있더라니!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였다. 뭐에 홀린 듯, 보자마자 연회 기획 TF가 있는 회의실을 찾아갔다. “나 한국인 인턴인데.. 내가 빅뱅 노래 하면 안될까? 한국말 가사를 한국인이 부르는 게 더 쉬울텐데~?”
알리바바 안에서 일하는 분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 일이 엄청 바빠서 먼저 다가와주지는 않지만,
내가 뭐 해보겠다고 먼저 내밀면 절대로 NO가 없다. 무조건 환영해준다. 어? 그래 좋네 해봐! 이런 식.
역시, 열린 사람들 같으니! 나보고 해보란다 ㅎㅎ
그렇게 나는 한달간의 노래, 안무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확히 4월 12일, 나는 3000명의 알리바바 직원분들 앞에서 빅뱅의 판타스틱 베이비 공연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통틀어서 한번도, 정말 한번도 장기자랑에 나가보지 않은 내가 알리바바 그룹의 넘버 투, 다니엘 장을 비롯한 알리바바 사람들 앞에서 빨간 빤짝이 자켓을 입고 몸을 흔들어댔다.
‘이제 난 무서울 게 없구나..’ 싶었다. ㅋ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정확히 그 해 9월에 상하이에서 연대동문회와 고대동문회의 만찬 자리에서 약 200명이 넘는 선배님들 앞에서 판타스틱 베이비 공연을 또 한번 했다.. 그것도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내가 손들고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뒤로도 패기를 키워주는 그 순간 순간들이 참 많았다.
연회에서 공연을 준비한 직원들만 참석하는 뒷풀이장이 기억 난다. 그 때 기획TF에서 만들어준 영상을 다 같이 봤는데, 참 감동적이더라. 진행을 맡은 두 기획팀원. 공연 전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사람 두 명 정도를 앞으로 불러내서 소감을 말하게 시켰다. 그걸 들으니 더 감동. 한달 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공연연습했던게 기억나니깐.
그 순간, 갑자기 앞으로 나가서 한마디 하고 싶어졌다.
‘헛, 근데 이런 시간이 있을지 모르고 미리 하나도 준비 안했는데..’
나로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입에 마이크를 대고 쏼라쏼라 이야기, 심지어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건 쉽지 않았다. 판타스틱 베이비 노래를 부르는게 더 쉬웠을 거다.
미리 조금 써서 외우고 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후회가 마구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꼭 나가서 마이크를 들고 싶었다. 역시 이제 무서울 게 없는게 맞는 거였음. 손을 따악 들고, 말했다.
“나도 할말이 있는데 앞에 잠깐 나가도 될까?”
앞에 섰다. 준비한 멘트는 없었다. 그냥 진심을 담아서
“내가 외국인이라 함께 이런 프로젝트 하기 어려웠을텐데 날 잘 감싸주어서 정말 고마워… 블라블라”
와. 패기 넘쳤다.
조금 더듬더듬거렸지만, 듣고 있던 동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쳐주었다. 나의 패기가 값지다는 걸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는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