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대학원생 :시작부터 포기할래?!

학교를 포기할 수 없으니 과목을 포기해

by 똑똑한호구

어떤 사람들은 회사에서는 본인이 가진 에너지의 70%만 쓰라고 조언한다. 아무리 100%를 쓰려고 해도 저마다의 이유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지 못하는 비멀티플레이어다. 사실은 한 가지만 겨우 하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한 가지에 완전 몰빵 하는 것처럼 보여서 회사에서는 회사밖에 모르는 일중독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배우자나 자녀가 없다 보니 집 <->회사 <->집 <->회사의 단조로운 삶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는 것은 비멀티플레이어인 나에게는 자연스러웠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회사에서 나는 성장했고 일에도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회사생활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차츰 회사일에 매몰되고 있었으며, 내 몸과 마음이 나에게도, 그리고 회사에게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던 어느 때. 그리고 내가 소진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던 어느 때... 나는 나를 일깨워줄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고 그것을 새로운 환경에 두는 것으로 정해 결국 대학원을 선택했었다.


선택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냥 친한 친구가 다닌 대학원에 공고가 난 것을 우연히 보고 지원한 거였다. 남들은 포트폴리오를 내거나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하거나 한다는데, 나는 고작 대학원 원서제출에 필수인 토익시험만 봤을 뿐 나는 그 어떤 추가서류도 하나 없이 그냥 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면서도 "안 뽑아주면 안 가면 그만이지"라는 마음으로 교수님들을 만났다.


간절히 원하고 원했던 것도 아니었던 만큼 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덜컥 붙어버리는 바람에 원서접수 할 때랑은 다르게 입원등록을 하기 싫은 청개구리 같은 심리가 튀어나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간 학교는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똑똑하고 유능한 20대부터 대체로 30대까지가 대부분인 날고 기는 동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체 왜 내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인가...? 뭔가 실수인가 싶었는데 아마도 원인을 생각해 보니 나이, 성별, 경력 등등 최대한 다양함을 추구해서 시너지를 내겠다는 학교의 선발 방식에, 내 나이의 여자가 이런 커리어를 가진 상태에서 지원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이 나중에 연령, 경력등 분포도를 보고 내린 나의 결론이었다. (결국 운빨이었단 얘기)


교수님들과 비슷한 나이에 야간 석사과정에 들어오다 보니 나는 뭐든 남들보다 두 배, 새배이상 느리고 더뎠고, 필수과목 중 하나인 통계학에서부터 난관이 시작돼... 자퇴할까...?라는 고통스러운 고민을 하다 울면서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어느 곳에 가도 처음엔 그렇게 적응하기 어려워하고 울고 그랬던 것 같다.)


첫 학기의 중간고사가 다가왔을 무렵, 진짜로 자퇴원서를 쓸 뻔했는데 이렇게 그만두는 게 나은지 아니면 이렇게 부족한 나를 계속 이 수업과정에 두는 게 나을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울고 있는 나에게 언제나 강력한 후원자이며 조력자였던 언니는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대학원 끝나고 나면 엄청 똑똑해져 있을 거야"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수천만 원을 써가면서 이렇게 좌절과 고통을 느껴가며 이 상황을 견뎌야만 하는 것인가...? 이 나이 많은 무능한 중년 아줌마를 동기들이 기피하면 어쩌지? 아니 일단 이 무능함이 드러나는 것부터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대학원을 이미 일찌감치 나온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대학원도 D나 F를 줘? 그렇게 나오면 재수강해야 돼?"


난 D나 F가 나오는 것보다 재수강이 더 싫었다.


"그냥 C를 목표로 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대학원은 학점 같은 거 신경 안 쓰기도 하고, 그리고 대학원으로 취직할 것도 아니니까 학점은 그냥 포기하자."


울고 있던 나에게 언니가 제시한 구체적인 설득방식은 내가 자퇴원서를 내지 못하고 중간고사기간을 넘기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략적 선택


나는 그룹과제를 제일 우선으로 한다. 그다음 개인과제 중 발표가 있는 것에 집중한다. 그냥 보고서로 제출하는 것은 후순위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적이 아니라 이 대학원 과정에 함께 있는 동기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에 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하고 나니 과목별로 뭘 해야 할지도 윤곽이 드러났다. 물론 그 지긋지긋했던 통계학은 교수님 강의 동영상을 6번을 봐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으니 그때의 좌절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내 인생에서 6번이나 똑같은 강의를 반복해서 듣고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수업이 있을 거라고, 아니 그런 수업을 내 인생에서 듣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쯤의 수학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미분과 적분은 기본은 학교 다닐 때 다 배웠죠? "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이 나에게 얼마나 자괴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실은 나는 슈퍼문과라 적분은 아예 배운 적도 없다. 나중에 문과출신들이 미분, 적분을 안 배웠을 수 있다는 것에 교수님이 적잖이 놀라시고 나중에 사과를 하시는 웃픈 일도 있었지만 ㅎㅎ)


내 전략적 선택


야간 대학원의 첫 학기에서 실시간으로 시험을 보는 통계학은 포기하고 그 외 다른 발표나 과제제출, 또는 조별과제가 있는 과목들만 어떻게든 버텨보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학교를 포기한 적은 없으니 과목을 포기하자.


그렇게 나는 마흔이 넘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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