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프롤로그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건조한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내 앞으로 서류 뭉치가 밀려왔다. '개인회생 신청서'.
굵은 고딕체로 박힌 그 일곱 글자가 마치 내 인생에 찍힌 낙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쭈뼛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인 볼펜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판촉물로 받은 것 같은, 플라스틱 몸체에 아무런 로고도 없는 싸구려 볼펜이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낯설고 가벼웠다.
펜 끝을 종이에 대자마자 미세한 떨림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잉크가 말라버린 탓인지, 아니면 내 의지가 마른 탓인지 첫 획이 제대로 그어지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힘을 주어 종이가 움푹 패이도록 이름을 꾹꾹 눌러썼다.
'김. 선. 우.'
이름 석 자를 적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초.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내 서명은 이런 무게가 아니었다.
묵직한 몽블랑 만년필의 뚜껑을 경쾌하게 열고, 수천만 원, 아니 수억 원이 오가는 투자 계약서 하단에 물 흐르듯 휘갈기던 그 우아한 서명.
그때 내 이름은 권력이었고, 확신이었으며, 미래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였다. 나는 내가 세상의 파도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서퍼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똥이 묻어나는 플라스틱 볼펜뿐이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제 '실패한 채무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꼬리표에 불과했다.
"다 되셨습니다. 접수되면 연락드릴게요."
사무장의 무미건조한 말에 나는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깃이 누렇게 바랜 셔츠를 입고 어깨가 축 처진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나는 멍하니 거울 속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확신이 오만으로, 믿음이 배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인생의 중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은, 바로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