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제3장
"뚜우... 뚜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신호음은 끔찍할 정도로 건조하고 규칙적이었다. 1초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그 기계음이 마치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처럼 내 고막을 긁어댔다.
'제발, 제발 받아. 아니라고 해줘. 뭔가 착오가 있는 거라고.'
나는 휴대폰을 쥔 오른손에 온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서 배어 나온 땀으로 액정이 흥건하게 젖어 미끌거렸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대학생이 나의 불안한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눈을 피했다. 평소라면 '뭘 봐'라고 속으로 쏘아붙였겠지만, 지금은 그 시선을 마주할 힘조차 없었다.
지하철은 야속하게도 흔들림 없이 달렸다.
"이번 역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자 문이 열리고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그 소란스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나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귀에 댄 휴대폰은 점점 뜨거워지는데, 내 손끝과 발끝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뚜우... 뚜우... 달칵.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연결이 끊겼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불길한 상상이 꼬리를 물고 올라오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떨쳐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민석은 내 대학 동기다. 10년 지기 친구다. 내 결혼식 사회를 봐줬고, 돌잔치 때 금반지를 끼워준 녀석이다. 그런 놈이 나를 사지로 몰아넣을 리 없다. 분명 지금 이 폭락장 속에서 내 돈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도 버튼을 누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내 믿음을 비웃듯 가혹하게 돌아갔다.
지잉- 지잉-
통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증권 앱 알림이 화면 상단을 덮었다.
[강제 청산 1차 경고: 담보 비율 95% 하회. 즉시 입금 요망.]
[강제 청산 2차 경고: 담보 비율 80% 하회...]
경고 메시지가 1분 간격으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었다. 내 살점이 뜯겨나가고 있다는 실시간 중계였다. 마이너스 통장, 카드론, 제 2금융권 대출, 그리고 담보 대출받은 전세 보증금.
그 모든 돈이, 디지털 숫자 '0'을 향해 자유낙하하고 있었다.
"아, 아아..."
나도 모르게 짐승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이 꽉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넥타이가 목을 조르는 뱀처럼 느껴졌다. 나는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풀었다. 단추가 뜯겨 바닥으로 튀었지만 주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사람 왜 저러지?' '술 취했나 봐.'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나는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그들이 상상도 못 할 돈을 굴리는 자본가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하철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서 있기도 힘든, 알코올 중독자보다 못한 패배자로 전락해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노약자석 옆 기둥에 몸을 기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때,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신호음이 짧았다.
"여보세요?"
누군가 받았다. 하지만 민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낯선 여자의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었다.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삐 소리 후..."
배터리가 없어서 꺼진 게 아니다. 이젠 폰이 꺼져 있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의 회로가 끊어졌다.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설마'라는 희망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지하철이 한강 다리를 건너며 창밖으로 검은 강물이 스쳐 지나갔다.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들이 어지럽게 일렁였다. 저 수많은 불빛 중에 내 것은 없었다. 나는 이제 꺼진 불빛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액정이 깨지며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