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제 4장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하철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고,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비틀거리며 내렸다. 터덜터덜 걷다 보니 어느새 오피스텔 현관 앞이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낯설었다. '삐비빅.' 경쾌한 기계음이 오늘따라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공기가 나를 반겼다.
지극히 세련되고, 지극히 차가운 나의 공간.
거실 한가운데 놓인 3인용 가죽 소파는 48개월 할부였고, 벽에 걸린 75인치 TV는 지난달 카드론으로 샀다. 창가에 놓인 최고급 스피커와 와인 셀러까지. 이곳은 '성공한 30대 싱글남'을 위한 완벽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모든 물건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나는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센서등이 꺼지자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누군가 "다녀왔어?"라고 물어봐 줄 사람도, 내 비참한 얼굴을 보고 놀라줄 사람도 없었다. 혼자라는 사실이 자유로웠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고립감이 숨통을 조여왔다.
액정이 깨져 거미줄이 간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댔다. 깨진 유리 조각이 귓바퀴를 찔러 따끔거렸지만,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받아라... 제발 받아라...'
수십 번째 시도였다. 신호음이 갈 때마다 내 심장도 함께 쪼그라들었다.
뚜우... 뚜우... 달칵.
"여보세요."
드디어 연결되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내가 알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민석이 아니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깊은 우물 바닥에서 들려오는 듯한 패배자의 목소리였다.
"야... 민석아. 너 왜 이제 받아? 어떻게 된 거야? 응? 빨리 말해봐."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고요한 방 안의 공기에 압도되어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선우야..."
"내 이름 부르지 말고! 상황을 말하라고! 앱이 미쳤나 봐. 마이너스 90%가 찍혀 있어. 이거 오류지? 너는 알 거 아니야."
나는 횡설수설하며 매달렸다. 제발 그렇다고 해달라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안심시켜 달라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길고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 침묵이 텅 빈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잠시 후, 민석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뭐?"
"레버리지가... 너무 컸어. 관세 발표 나자마자 알고리즘 매도가 쏟아졌고... 반대매매 막을 틈도 없이 그냥 밀려버렸다. 나도 다 날렸어. 깡통 찼다고."
"내 돈은? 야 이 새끼야! 그게 어떤 돈인데! 전세 보증금 뺀 돈이라고! 니가 확실하다며!!"
"이미 다... 청산당했어. 남은 거 하나도 없다."
뚝.
통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통화 종료'. 그 네 글자가 내 인생의 종료를 알리는 것 같았다.
"으으윽..."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저 빌어먹을 야경이 보이는 통유리창을 깨부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텅 빈 방에서 내가 소리를 지른들,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내 비명은 이 차가운 벽에 부딪혀 다시 내 고막으로 돌아와 꽂힐 뿐이었다. 그 처절한 메아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소파로 다가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창밖으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 발아래 있는 레고 블록'이라며 비웃었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불빛들은 나를 향해 비웃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덤비더니 꼴좋다.'
나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둠 속에서 어깨가 격렬하게 들썩였다. 하지만 방 안에는 옷깃이 스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오만했던 나의 성에는 이제 빚이라는 괴물과 나, 단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