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제 5장
"지잉- 지잉-"
책상 위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그 소리는 내게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인 흥분을 일으켰다. 주식이 올랐다는 알림이거나, 민석이 보내는 새로운 정보일 거라는 기대감. 그래서 0.1초 만에 화면을 뒤집어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진동 소리가 들리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명치끝이 뻐근해지며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드는 대신,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마치 책상 위에 놓인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나는 곁눈질로 조심스럽게 액정을 훔쳐보았다.
[02-1588-XXXX]
모르는 번호. 하지만 너무나 잘 아는 번호. 카드사 채권추심 팀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벌써 오늘만 다섯 번째였다. 오전에는 마이너스 통장 만기 연장 불가 통보 전화였고, 점심때는 제2금융권 이자 연체 독촉 문자였다. 그리고 오후 3시, 이제는 카드값 독촉이다.
내 휴대폰은 더 이상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는 스마트한 기기가 아니었다. 24시간 내내 빚을 갚으라고 소리 지르는, 내 주머니 속의 족쇄였다.
"김 과장, 전화 안 받아? 계속 울리는데."
옆자리 박 대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라면 "아, 스팸이야."라고 쿨하게 넘겼겠지만, 지금은 그 사소한 질문조차 심장에 가시처럼 박혔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 어. 스팸 전화가 요즘 너무 많이 오네. 잠깐 화장실 좀."
나는 도망치듯 휴대폰을 뒤집어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사무실 복도를 걷는 내 걸음걸이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나는 복도 한가운데를 당당하게 가로질렀다. 어깨를 펴고, 마주 오는 사람들에게 여유롭게 눈인사를 건네며, 내가 이 공간의 주인인 양 활보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복도 벽에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마치 내 몸이 차지하는 부피를 최소한으로 줄여야만 들키지 않는 죄인처럼.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봐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에 비친 내 모습이 구겨진 신문지 조각처럼 초라해 보였다.
화장실 맨 끝 칸. 그곳이 내 유일한 도피처였다.
문을 잠그고 변기 뚜껑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좁고 밀폐된 공간이 주는 묘한 안도감. 적어도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채무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진동을 무음으로 바꿨다. 화면에는 여전히 '부재중 전화 10통'이라는 빨간 숫자가 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멍하니 타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민석과의 통화 이후, 내 계좌는 문자 그대로 '증발'했다. 반대매매로 모든 주식이 강제 처분되었고, 남은 건 주식이 아니라 갚아야 할 원금 손실액뿐이었다. 전세 보증금까지 날렸으니, 나는 이제 빈털터리가 아니라 빚쟁이였다.
월급? 이자 갚기도 빠듯했다. 아니, 이자는커녕 당장 다음 달 카드값을 막을 돈도 없었다. 돌려막기도 한계였다.
밖에서는 동료들이 들어와 낄낄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번 주말에 뭐 할 거야? 나 이번에 새로 나온 골프채 샀는데."
"오, 부러운데? 나는 여자 친구랑 호캉스 가기로 했어."
그들의 대화는 너무나 평범하고, 그래서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도 저 대화 속에 섞여 있었다. 아니, 오히려 "골프채가 그게 뭐냐, 이번에 나온 신상 정도는 써야지."라며 훈수를 두던 게 나였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저 투명한 유리벽 너머의 세계로 튕겨져 나온 이방인이었다. 4,500원짜리 김밥을 고민하던 그들이, 지금은 감당하기 힘든 빚을 진 나보다 훨씬 더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그때, 또다시 화면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문자가 왔다.
[OO캐피탈] 김선우 님, 금일 오후 4시까지 연체금 입금 확인되지 않을 시, 기한이익상실 및 법적 절차 진행 예정임을 알려드립니다.
'법적 절차'.
그 단어가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급여 압류가 들어오면 회사에도 알려질 것이다. 김 과장이 빚쟁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 좁은 화장실 칸이 감옥 독방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감옥이라면 밥이라도 줄 텐데. 나는 빚이라는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인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었다. 눈 밑은 퀭했고, 피부는 푸석했으며, 무엇보다 눈동자에 생기가 없었다. 죽은 생선의 눈.
나는 찬물로 세수를 하며 거울 속의 남자에게 속삭였다.
"버텨. 아직은... 들키면 안 돼."
자리로 돌아가는 길, 나는 여전히 복도 벽에 어깨를 비비듯 걸었다. 내 몫의 공간은 이제 딱 그만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