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원짜리 서명

그 날, 제 8장

by MingDu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두 달 뒤, 나는 서초동 법원 앞, 허름한 상가 3층에 있는 법무사 사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낡은 가죽 소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앉았다 일어났는지 가운데가 푹 꺼져 있었다. 벽지에는 누런 물자국이 얼룩덜룩했고, 공기 중에는 믹스커피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묘한 패배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은 '패배자들의 대합실'이었다.

내 맞은편에는 갓난아이를 업고 연신 눈물을 훔치는 젊은 여자, 등산복을 입고 허공만 응시하는 5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죽어 있었다. 희망이 증발해 버린 건조한 눈동자들. 불과 1년 전만 해도 나는 이들과 내가 같은 공간에 섞일 수 없는 인종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들과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서류 봉투를 쥐고 앉아 있었다.

카드 돌려막기의 끝은 파산이 아니라 회생이었다. 더 이상 빌릴 곳도, 팔 물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은행, 카드사, 대부업체... 내 연락처에 저장된 모든 금융기관이 나를 추격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한 마지막 비상구, 그것이 '개인회생'이었다.

"김선우 씨, 이쪽으로 오세요."

사무장이 건조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명씩 쏟아지는 나 같은 실패자들을 상대하느라 감정이 메말라 버린 것 같았다.

상담 테이블 위로 두꺼운 서류 뭉치가 '쿵' 하고 놓였다. [개인회생 변제계획안] 굵은 고딕체로 박힌 그 여덟 글자가 마치 내 인생에 찍히는 낙인처럼 느껴졌다.

"채무 총액 3억 2천. 현재 소득 기준으로 산정된 변제 계획입니다."

사무장은 빨간색 펜으로 서류의 핵심 내용을 짚어가며 설명했다.

"매월 월급에서 최저생계비 120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액을, 앞으로 60개월 동안 법원에 납부하셔야 합니다. 120만 원으로 월세, 식비, 통신비 다 해결하셔야 하고요. 한 번이라도 연체되면 바로 폐지됩니다. 아시겠죠?"

120만 원. 그리고 60개월. 머릿속이 멍해졌다. 5년. 내 30대의 절반이 빚 갚는 기계로 저당 잡히는 순간이었다. 그 5년 동안 나는 여행도, 외식도, 연애도 꿈꿀 수 없을 것이다. 친구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낼 수도, 조카에게 세뱃돈을 줄 수도 없다. 그저 숨만 쉬며 노동하고, 그 대가를 고스란히 법원에 바쳐야 하는 형기(刑期).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자, 여기 채권자 목록 확인하시고, 맨 뒷장에 서명하세요. 펜 여기 있습니다."

그가 무심하게 내민 것은 어디 보험회사 판촉물로 굴러다니던, 뚜껑도 없는 150원짜리 플라스틱 볼펜이었다. 하얀 몸통엔 파란색 로고가 반쯤 지워져 있었고, 손잡이 부분엔 때가 타 거무튀튀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펜을 잡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이 너무나 가볍고 조잡했다.

순간, 묵직하고 차갑던 몽블랑 만년필의 그립감이 전생의 기억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천만 원이 오가는 계약서에 호쾌하게 사인을 휘갈기던 시절. 그때 내 손에 들린 펜은 권력의 지팡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린 이 미끄러운 플라스틱 쪼가리는, 내가 가진 것 없는 빚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일깨워주는 초라한 도구일 뿐이었다.

펜 끝을 종이에 대고 힘을 주었다. '찌익-' 잉크가 말라버린 탓인지 쇳소리만 나고 첫 획이 나오지 않았다. 볼펜 똥만 뭉쳐 나왔다.

나는 종이 위 빈 공간에 펜을 신경질적으로 빙글빙글 돌려 잉크를 낸 뒤, 다시 서명란에 펜을 가져다 댔다. 손이 제멋대로 떨려 글씨가 삐뚤어졌다.

'김... 선... 우...'

종이가 찢어질 듯 꾹꾹 눌러쓴 이름 석 자. 글자 하나하나를 쓸 때마다, 내 오만했던 과거가 하나씩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김'을 쓸 때,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거들먹거리던 내가 죽었다. '선'을 쓸 때, 친구를 믿는다며 떵떵거리던 내가 죽었다. '우'를 쓸 때, 세상이 내 발아래 있다고 믿었던 그 멍청한 놈이 죽었다.

이곳은 내 인생의 장례식장이었다. '성공을 꿈꾸던 김선우'는 오늘부로 사망했고, '채무자 2024-회-1028 김선우'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손끝에서 힘이 빠져 펜을 놓쳤다. 툭, 하고 볼펜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이상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가슴이 미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긴 한숨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휴대폰 진동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6,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성공한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바닥을 쳤다. 더 내려갈 곳 없는 시멘트 바닥.

내 자존감은 이 1,500원짜리 볼펜보다 가벼워졌지만, 역설적으로 어깨를 짓누르던 3억 원이라는 공포의 무게는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락할 일은 없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접수되면 금지명령 나올 거니까, 그때부터는 독촉 전화 안 받으셔도 됩니다."

사무실을 나오니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는 그 인파 속에 섞여, 처음으로 벽에 붙지 않고 도로 한가운데로 걸어보았다.

주머니엔 버스비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망자가 아니었으니까.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빚을 갚겠다고 선언한, 떳떳한 패배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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