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제 9장
회생 신청을 하고 1년이 지났다. 나는 낡은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회사 근처의 보증금 500에 월세 40짜리 5평 원룸으로 이사했다. 차는 없고, 점심은 도시락을 싸 다녔다. 저녁에는 근처 배달 대행 알바를 뛰며 남은 빚을 갚아나갔다.
어느 눅눅한 금요일 밤이었다. 편의점에서 '4캔 만 원' 하는 맥주를 사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싼 안주는 꿈도 못 꿀 사치였기에,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2+1 행사 중인 맛살과 맥주 캔만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내 유일한, 그리고 초라한 낙이었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던 그때였다. 교차로의 정적을 깨고 육중한 엔진 배기음이 들려왔다.
“두둥, 두둥…”
도로의 요철을 부드럽게 넘은 검은색 세단이 정지선 앞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포르쉐 파나메라 터보. 차체의 유려한 곡선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고, 7777이라는 번호판은 그 차가 도로 위의 포식자임을 과시하는 듯했다.
‘누군지 몰라도 팔자 좋네’
나는 멍하니 그 차를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 속 맥주 캔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3,000원짜리 행복을 손에 쥔 나와, 3억 원짜리 차를 타는 누군가. 그 거리감은 횡단보도의 폭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그때, 짙은 선팅이 된 운전석 창문이 스르르 내려갔다. 차 안의 냉기가 훅 끼쳐 나오며, 운전자가 창밖으로 툭 하고 담뱃재를 털었다.
"아니, 김 대표님.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익숙한 목소리. 귀에 꽂히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지독한 기시감.
나는 홀린 듯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전자는 한 손으로 핸들을 툭툭 치며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매끄럽게 빗어 넘긴 머리, 자신감 넘치는 턱선.
민석이었다.
내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툭. 비닐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맥주 캔이 찌그러지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 날렸다며... 깡통 찼다며...'
내 머릿속이 하얗게 멈춘 사이, 민석의 건조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때 폭락장 아니었으면 우리도 엑시트 못 했죠. 개미들이 공포에 질려서 매수 물량 받아준 덕분에 숏 포지션 청산이 깔끔했잖아요. 네, 타이밍이 예술이었죠."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죄책감은 무슨. 투자는 본인 책임이죠. 시장 수업료 좀 비싸게 냈다고 생각하라고 하세요. 이번 주말 골프는 예정대로 가시죠."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었다.
"부아앙-"
그는 미련 없이 엑셀을 밟았다. 굉음과 함께 포르쉐는 순식간에 멀어져 점이 되었다. 남겨진 것은 매캐한 매연 냄새와, 바닥에 뒹구는 찌그러진 맥주 캔, 그리고 멍하니 서 있는 나뿐이었다.
민석은 나를 속여서 짓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나를 '매수 물량을 받아주는 총알받이'로, 성공적인 엑시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버렸을 뿐이었다. 나라는 인간은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는 사실. 그 철저한 무관심이 악의보다 더 깊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어... 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맥주 캔을 주울 생각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1년 동안 무서워서, 혹시라도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있을까 봐 한 번도 검색하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강민석]
검색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렸다. 오타가 나서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뜬 검색 결과.
스크롤을 내리던 내 손가락이 멈췄다. 6개월 전 경제지 인터뷰 기사였다.
[인터뷰] 위기를 기회로, '헷지(Hedge)의 귀재' 강민석 대표를 만나다.
"지난번 관세 쇼크 때, 대다수의 투자자가 패닉에 빠졌을 때 저는 오히려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상승장이 끝났음을 직감하고, 모든 포지션을 하락장에 배팅하는 '숏(Short)'으로 전환했죠. 대중들이 공포에 질려 매도 물량을 쏟아낼 때, 그 물량이 제 수익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사진 속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마치 나를 보며 "멍청한 놈"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숏 포지션? 하락에 배팅해? 그는 알고 있었다. 주식이 폭락할 것을. 그러면서 나에게는 전화로 침을 튀겨가며 '강력 매수'를 권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영혼까지 끌어모아."
그의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더 끔찍한 진실이 뇌리를 스쳤다. 선물 옵션 시장은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 잃어야 누군가 번다. 그가 그토록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반대편에서 받아줄 '총알받이'들이 필요했다.
나 같은 개미들.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먹잇감들. 그는 내 매수 물량을 밟고 올라서서 자신의 숏 포지션을 구축한 것이다. 내 돈 3억은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라, 저 녀석의 포르쉐 엔진 부품이 되었고, 저 여자가 두른 명품 백이 된 것이었다.
"우욱..."
속이 뒤집혔다. 배신감과 모멸감이 위액과 함께 역류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 3억. 내 인생. 내 30대. 내 가족의 미래. 그 모든 것이 저 녀석의 유흥비로 탕진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나한테 "미안하다, 나도 다 잃었다"라고 거짓말을 하며 날 손절했다. 내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까 봐, 혹은 자신의 사기 행각이 들통날까 봐.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를 걱정했다.
살의(殺意). 난생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터질 듯이 박동했다.
"으아아아아악!!!"
나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찌그러진 맥주 캔을 집어 들어 아스팔트 바닥에 내리찍었다. 하얀 거품이 터져 나와 내 낡은 신발을 적셨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지만 상관없었다.
내 억울함을, 내 분노를, 내 잃어버린 1년을 어디에라도 쏟아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