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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령 Jun 19. 2019

나는 늘 변태한다

가치관도 취향도 모조리 변한다

'나 혼자 산다'에서 배우 이시언이 새 아파트로 이사 가고 난 뒤 매일 청소를 한다는 걸 보고 친구들이  얘기 아니냐며 카톡을 보내왔다. 그럴만한 게 도 그걸 보면서 엄청 공감했다.

내가 이사를 한 후 주변 지인들의 반응은 '이래서 정말 집이 중요한가 보다. 가령이가 집 청소를 하다니,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애가 생기를 얻었다, 신기하다' 등 등 뜨거웠다.

기안84도 충재 씨와 함께 예쁘게 집을 꾸민 후 뭔가 제자리에 놓아야 할 것 같다며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걸 보고 또 한 번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집 꾸미기에 도통 관심이 없고 정리정돈이라면 내 인생에서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일 쓰고 밖으로 나와 나뒹구는 물건이 아니면 어디에 있는지 늘 찾아 헤매기 일쑤였고 물건을 찾는 일을 제일 싫어했다.


나는 초등학교 6년 소풍 때마다 늘 하던 보물 찾기에서 단 한 번도 보물을 찾지 못한, 눈은 그저 장식인 아이다. 알고 보니 내가 늘 남들과 다른 포인트에서 보물을 찾고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쉽게 찾을 수 있게 놔둔 보너스 같은 보물들은 재빠른 아이들이 이미 가져가서 그런 곳에 놔둘 수도 있단 걸 꿈에도 몰랐고, 도통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들은 역시 보물이니까 꽁꽁 숨겨져 있구나 하고 돌더미 하나하나를 다 뒤집거나 애꿎은 흙을 파헤쳐보는 헛수고를 하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위해 보물을 숨기는 입장이 되었을 때야, 절대 그런 찾지도 못할 곳엔 숨기지 않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보물 찾기를 못 하던 나는 집에서 물건을 찾는 것도 싫어서 늘 엄마나 언니에게 찾아내라고 성화를 부렸다.


어릴 때 방학이 되면 사물함에 있는 모든 물건을 집으로 다 가져가게 했는데 게으른 나는 늘 조금씩 미리 집에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동동거렸다. 결국 엄청난 짐을 가져가야 했는데 학교 가방과 큰 종이가방 안에 아무리 물건을 욱여넣어도 도저히 들어가지가 않았다. 새 학년이 되면 어차피 다시 들고 올 것을 왜 힘들게 매번 들고 가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버리고 가버릴까? 엄마한테 새 학기 되고 다시 사달랬다가 맞아 죽겠지' 마음을 고쳐 먹고 뺐다가 이렇게도 넣어보고 저렇게도 넣어봤지만 도저히 다 넣을 수가 없어 애를 먹고 있는데 한 친구가 '이리 줘봐' 하고 차곡차곡 넣더니 그 많은 것들을 쏙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오히려 자리가 남아 보이기까지 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이후 나는 정리정돈도 타고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정리정돈과 더 멀어졌다.


정리를 못하는 습관은 나를 더욱 맥시멀리스트로 만들었다. 있는지 모르고 또 사는 것들, 굳이 잘 쓰지도 않을 것을 예쁘다고 세일이라고 합리적인 쇼핑 인척 사는 것,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산 물건들 둘러싸여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 나를 보면서도 고치지 못했다.


하지만 집은 사람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깔끔하게 리모델링되고 좀 더 넓어진 집은 수납공간이 갖춰지면서 정리가 되었다. 금방 곰팡이가 생기던 예전 집은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고 아무리 정리를 해보아도 깔끔함은 내 것이 아닌 듯했다.


늘 집이 깨끗한 친구가 있었는데 자기도 자주 청소를 하는 편이 아니라며,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물건을 둘 뿐이라 했다. 또 물건이 별로 없어야 치우기 쉬워 무엇보다 잘 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신중히 정했고 필요 없는 물건은 나름 과감히 버리거나 팔다.

동생이 나를 '쓰레기 수집가'라고 부르며 긴급출동 sos에 보내야겠다고 할 정도로 온갖 잡동사니를 다 끌어안고 살던 나였기에 엄청난 변화였다.


집이 깔끔해지자 예쁜 집에 관심이 생겼다. 스무 살 때 인테리어 잡지를 보며 이런 걸 보면 그냥 기분이 좋다고 했던 친구를 이해가 안 간다며, 나는 이런 걸 봐도 아무 느낌이 없다 했었는데 그때의 내가 이해가 안 될 정도이다. 지금은 집 꾸미기 어플을 끼고 산다.


집은 그냥 잠이나 자는 곳이라 여기고 내 집이 아니란 생각에 정을 주지 않았는데 집을 꾸미며 애착이 생겼다. 그리고 자발적 집순이가 되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밖에 나가는 것도 좋아하는 반면에 집에 그냥 누워있는 것도 좋아했지만 어딘가 기운이 없었다. 때때로 어질러진 방안을 보며 정리도 못하면서 스트레스만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있는 시간이 좋아졌고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여는 게 즐겁다.


'비록 두드러기를 얻으면서 생기를 다시 잃긴 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크게 깨달았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만큼 집이란 공간은 애정을 쏟을수록 나에게 더 포근한 휴식처를 안겨 준다는 것을.




크게 변한 의 가치관 중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신'이라는 존재이다. 어디 가서 정치나 종교는 싸움 날 일이 많으니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랬던가.

나는 어릴 때부터 어쨌든 신은 있다고 믿었고 다양한 종교 체험(?)했다. 특별한 종교 없으면 대부분 불교 신자라는 우리나라에서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셨다. 절에 자주 가셨고 대를 이을 손주를 원하셨는데 엄마가 줄줄이 딸만 낳자 불공을 드려 결국 귀한 손주를 얻으셨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절에 간 적이 있는데 나는 그 특유의 향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밖에 나와 놀고 있었는데 숲 속에 있던 절이라 오월의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아카시아 껌을 씹을 때 나는 향과 같은 게 신기하고 좋아 계속 그 향을 맡으며 취해 있었다. 그것 때문인지 나는 절에 대한 추억이 아카시아 향과 함께 스며 와 틋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친한 친구와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많은 추억을 쌓았고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스무 살이 되면서 시골에 있던 그 교회를 가기 힘들어지자 자연스레 종교 활동도 끊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이십 대 자기 계발 도서에 푹 빠져있을 무렵, 성공한 사람들은 꼭 종교가 있었고 이리저리 휘청이는 나를 인도해줄 큰 존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겪어본 것이 불교와 개신교뿐인지라 내가 종교를 택하게 된다면 당연히 둘 중 하나였다. 이번에 결정하면 배신하지 않고 하나만 평생 밀고 나가겠노라고 나 자신과 약속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근심이 생겼다.


종교 때문에 집안싸움이 많이 일어난다던데 내가 결혼할 남자와 종교가 다르면 어쩌지?


어차피 난 뭐든 '신'만 믿으면 되니까 차라리 결혼하고 남자의 종교에 따라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언제 하게 될 줄 알고 무턱대고 기다리나 하는 생각에 실행에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어이없는 고민을 많이 하는 걱정인형이다.


먼저 절을 검색하게 되었는데 도심의 절은 왠지 느낌이 지 않았다. 그래, 절은 역시 산속에 있어야지! 그런데 멀면 그만큼 잘 가게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교회. 하지만 매번 가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가려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아무 곳도 가지 못했다. (허무한가?)


그러다 대형 할인마트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같이 일하던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매일 성당을 갔다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당은 어떤 곳이냐고 몇 번 계속 궁금해하며 묻다 보니 이번에 세례 준비를 위한 교리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겠냐 해서 그렇게 긴 기간인 줄 모르고 덜컥 따라갔다가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예쁜 미사보와 세례명에 홀려 받게 되었지만 그 후,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너무 열심이었던 탓에 권태기가 온 것일까. 8년을 의심 없이 내 인생에 하느님이 항상 함께 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나란 여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고 신앙이라 하지만, 어쨌든 어떤 신이든 신은 분명 있다고 믿었던 내 생각이 어쩌면 바보 같은 생각인가 하고 말이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비와 바람, 햇빛도 신이 내려 주신다고 굳게 믿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고 모든 게 신의 뜻이란 미영하에 권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신은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으나 인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하지만 결국 나는 또 그 두려움에 휩싸여 인간에게 휘둘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멋대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대세(사제를 대신하여 예식을 생략하고 세례를 주는 일)를 받는 건데 하고 후회되었다.


신이 있다면 내가 정말 지옥에 갈 만큼 악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나를 어떻게든 보호해 줄 것이고 사랑해 줄 것이다. 그런 신이 아니라면 필요 없다. 나에게서 이제 신은 죽었고, 니체가 나의 오빠가 되었다. 다신교에서 결국 무신론자가 되어 버린 나는 또 언제 마음이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오래갈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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