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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Aug 04. 2022

나란 사람 사랑 설명서

07. 이런 사랑, 바라는 바다.

봄에는 나물을 뜯자.  

지갑 하나 들어가는 작은 가방을 메고 검은 봉지 달랑 들고 산으로 가자. 이제 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고사리 그리고 취 그리고 운이 좋으면 고비를 찾을 수도 있겠지. 고사리와 취가 뭔지 모르는데 어쩌냐고? 에이 걱정 마.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열 살도 되기 전부터 나는 봄이면 하굣길에 고사리를 꺾어서 꽃다발처럼 엄마에게 안겨드렸으니까. 뭐가 봄나물인지 못 알아볼 걱정은 넣어둬. 산에서 나를 잃어버리지만 않으면 되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는 봄꽃도 반갑지만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나물이 참 좋아 나는. 나물의 향도 좋고, 맛이야 말해 뭐해. 욕심이 난대도 심마니처럼 나물을 뜯어대진 말자. 혹시 내가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꼭 말려주길 바라. 계절이 주는 선물을 적당히 즐기면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자. 그러다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고속도로 길가에 있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흔한 식당에 들어가서 산채비빔밥이랑 청국장을 주문하는 거야. 커다란 양푼에 나물을 골고루 넣고 청국장을 두 숟갈 넣은 다음에 싹싹 비벼서 먹자. 청국장 넣을 때 두부를 빼먹어선 안되는 거 알지? 


여름은 바다지 바다.  

대천 나이트(라 쓰고 대천 해수욕장이라 읽는)보다 눈이 멀 것 같은 형광색 바지와 깊게 파인 암 홀의 민소매 티셔츠가 넘실대는 부산보다는 동해가 좋겠네. 친구 고향이 동해라 예전에 고등어회를 먹은 적이 있거든. 그리 길지 않은 시장 골목에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고등어의 배를 가르고 마법처럼 회를 썰어 내는데 한참을 봐도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았어.(고등어 배를 좌악 갈랐을 때 피가 배어 있으면 그건 벌써 회로 먹을 수 없는 고등어래. 갓 잡은 고등어만 회로 먹을 수 있다고) 고등어회 한 접시를 가지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신문지를 대충 깔고 먹는 거야. 술은 고등어회가 부드럽게 목에 넘어갈 수 있도록 몇 잔만 곁들이는 게 좋겠다 그치? 

선크림은 대충 쓱 바른 다음에 파라솔 하나를 제값 주고(나는 가격 흥정에는 재주도 흥미도 없는 편) 빌린 다음에 일찌감치 바다 근처에 자리를 잡자. 아 맞다, 래시가드는 입지 말자 응? 난 그게 그렇게 싫더라. 우리 언니도 조카도 형부도 다 그거 입던데, 나는 그게 참 어색해서 싫어. 그거 입을 바에야 차라리 청바지를 입고 들어가고 말지 흥. 큰 튜브를 타고 둥둥 떠다니다가 파라솔 아래로 돌아와서 책을 보면서 잠깐 졸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는 거야. 그렇게 반나절을 바다에서 보내고 나면 누가 봐도 휴가 다녀온 사람처럼 까맣게 타겠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훤히 보일 만큼 까맣게 타는 거, 그게 그래도 래시가드보다는 낫다 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빠지기 전에 일찌감치 짐을 정리해서 숙소로 들어온 다음에 깨끗하게 씻고 햇빛에 바싹 마른 바스락거리는 티셔츠를 입고 실컷 빈둥대는 거야. 그러다 또 잠깐 졸아도 좋고. 

“아, 평생 이러고 살면 좋겠다.” 

“아, 다시 일하러 가기 싫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지금 이 순간이 참 좋다는 말을 나누고 바쁜 일상으로 돌아가기 너무 아쉽다고 투덜거리겠지? 그 순간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다 끝내지 못하고 온 일 생각, 다시 가서 해야 할 일 생각이 가득 하단 건 나만 아는 비밀. 


경주에 친구 어머니가 게스트하우스를 해. 

이름은 도란도란 게스트하우스. 이름 참, 귀엽지? 이름만큼 공간도 참 귀여워. 작은 한옥을 정감 있게 꾸며놔서 문에 들어서면 절로 미소가 지어져. 근데 집이 이쁘다고 한마디 꺼내면 친구가 “너, 블로거처럼 말하면 혼난다?!”라고 구박을 하니까 그런 얘기는 우리 둘이 있을 때만 하자, 알았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던 여름에 그리고 한 해 마지막 날을 얼마 앞둔 겨울에도 혼자서 경주를 찾았어. 거기 친구가 있으니까 혼자여도 외롭지 않게 여행을 할 수 있고 좋더라고.  

근데 가을 경주는 애인 생기면 같이 가려고 아껴뒀지 헤헤. 가을이면 불국사 가는 길 단풍이 참 예쁘겠더라고.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아도 투덜대기보다 그 사람들 속에서 함께 우르르 사진을 찍자. 하나도 고즈넉하지 않고 시장통 같아도 뭐 그런 게 여행의 맛이기도 하잖아? 책에 나온 유적지를 도장 깨기 하는 것처럼 볼 생각은 없어. 경주는 그냥 걷다가 툭툭 놓여있는 커다란 무덤만 봐도 참 좋거든. 걷다 쉬고 걷다 쉬면서 경주의 풍경을 두 눈에 가득 담자.  

혼자 갔을 때 밤 산책을 못해서 아쉬웠어. 그래서 나중에 오면 불 꺼진 밤에 무덤들 사이를 꼭 걸어보려고 다짐했지. 깜깜한 밤에 나와서 무덤과 무덤 사이를 한가하게 산책하고 하늘에 뜬 별을 보고 죽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경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도 운치가 있겠지? 아 맞다, 거기 빼먹지 말랬어 친구가. 경매시장. 친구가 그러는데 경주는 아직 땅에 묻힌 유적이 발견되곤 하고 소소한 것들은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나 봐. 거기 가보면 참 재밌다고 그랬거든. 너랑 나도 거기 가서 경매 구경을 하자. 누가 알아? 거기서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발견하게 될지.    


겨울엔 눈 쌓인 태백산을 빼놓을 수 없지. 

서울에서 열한 시 즈음 출발하는, 빠른 거 말고 역마다 다 서는 그런 기차를 타야 돼. 그걸 타면 새벽 서너 시쯤 태백역에 도착하거든. 태백역 도착해서 근처 찜질방에서 뒹굴대고 몸도 좀 녹이다가 산에 오르는 거야. 태백산은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눈이 쌓였고 새벽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서너 시간을 오르면 금방 산 정상이야. 정상으로 가는 길에 눈꽃이 가득한 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데 그게 참 그림처럼 아름다워. 정상에 얼마 있다 보면 커다란 해가 떠오르는 걸 볼 수 있어. 저 멀리서 빨간 해가 하늘로 솟아오르는데 보고 있으면 신기할 따름. 나 사는 서울에도 매일 뜨는 해라는 걸 알면서 산 위에서 보는 그 해는 마음을 벅차게 하는 구석이 있어. 함께 그 장면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도 좋겠다. 나는 아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게 해 주세요 하고 빌까, 여기 이 사람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 주세요 하고 빌까. 아마 두 손은 모으고 있으면서 속으로는 ‘아, 언제 또 내려가지’ 나 ‘내려가서 뭐 먹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  


사계절이 있는 내 조국에 사는 즐거움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신나게 떠들고 즐기는 거야. “와, 봄이다.” “와, 이번 여름은 정말 징그럽게 덥다.” “이번 가을은 유독 짧은 거 같지 않아?” “눈 펑펑 내리면 좋겠다.” 이래 가면서. 매년 겪는 계절의 변화를 유난스레 반기고 마음껏 즐기면서 계절 속에 추억을 차곡차곡 쌓자. 나는 이렇게나 소박하고 귀여운 사랑을 바라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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