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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 Aug 15. 2022

나란 사람 사랑 설명서

08. 벌건 대낮의 사랑 

나의 다음 사랑은 벌건 대낮의 사랑이어야 할 거야.  

벌건 대낮의 사랑에는 해파리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랑이 있고, 눈이 부실만큼 쨍한 감정이 있고, 커플 티처럼 촌스럽지만 공식적인 관계가 있어. 나는 그냥 남들이 다 알만한 뻔하디 뻔한 그런 사랑을 할 거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지금부터 말해볼게. 




“다른 건 몰라도 혹시 내가 결혼을 한다면 너랑 할 거야”

그때의 난 이걸 미래를 위한 약속이라고 생각했어. 그가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는 게 지금 그가 만나는 ‘공식적인’ 애인이 아닌 실은 나라는 게 좀 짜릿했지. ‘우리 관계는 좀 특별한 것뿐이야’라는 자기 위로. 지금 생각하면 대책 없이 순진한 걸 넘어 한숨이 나올 만큼 어리석었구나 싶지만. 어릴 땐 누구나 좀 그렇기도 하잖아?  

공식적으로 이별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연락을 해왔을 때 솔직히 반가웠어. 그렇게라도 그를 계속 만나고 싶었나 봐. 나는 그가 여전히 좋았거든. 그런 내 마음을 그가 알아채면 다시 만날 수 없을까 봐 나는 내 감정을 깊숙이 숨겨두기로 했어. 나도 너처럼 쿨 하게 그렇게 만나는 거야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던 것도 같아.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애인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나와도 계속 만나고 싶다고. 그 말을 듣고 내 표정이 좀 그랬던 모양이지? 그가 곧 이 말을 덧붙이더라고.  

“우린 좋은 친구잖아. 그렇지?”  

이 말에 나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했어. 친구라니 라는 탄식, 친구라고?라는 날 선 질문, 친구구나 라는 서글픔 체념 그중 어느 것 하나 겉으로 속 시원히 꺼내놓질 못하겠는 거 있지? 이 관계의 문제는 그를 향한 나의 마음에는 사랑이 더 많은 지분을, 나를 향한 그의 마음에는 우정이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니 나는 그를 향한 내 마음 역시 우정에게 더 많은 자리를 내어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거든. 친구라면 그도 굳이 나와의 만남을 애인에게 비밀로 할 이유가 있었을까. 친구였다면 서로에게 솔직 했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친구라면 함께 보낸 그 밤과 그 시간들은 대체 뭐였지? 

그에게 애인이 생겨버린 이상 그와 나 사이의 비밀은 한층 복잡하고 위험해졌지. 그전까지 그를 향한 마음은 그에게만 숨기면 되었는데 말이야. 이제는 그의 애인에게도 숨겨야 하잖아. 그래도 괜찮았어. 그래도 괜찮았어. 비밀이어도 우리 둘 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세상에 비밀일수록 내 감정은 더욱 간절하고 농도가 짙어졌거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을까. 있다면 그때 그 일이 영원한 비밀이었으면 좋았을걸. 어느 날 그가 다급하게 나에게 말하더라.  

“여자 친구가 알았어” 

대답을 듣자고 한 질문이 아닌 것 같아서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더니 그가 한마디를 더 보태더라.  

“근데 내가 뭐 너랑 연애 같은 걸 한 것도 아니잖아?” 

그날 집에 오면서 그의 말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한 내가 짜증이 나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에게 분해서 울었어. 그리고 지금 이 슬픔이 내가 선택한 거라는 게 화가 나서 몸서리가 쳐졌고. 근데 한편으론 좀 겁이 나기도 했는데 말이야. 세상이 이 비밀을 다 알아버릴까 봐. 지나는 사람이 나를 몹쓸 사람이라고 욕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래서 난 겁이 났어. 내 친구들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제라도 그 관계를 끊어내서 다행이다”라고. 무엇보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상대와 만날 이유 같은 건 없다고 내가 친구들에게 했던 그 말을 나에게 그대로 되돌려 줬을지도 모르지.  


비밀도 습관인 거 알아? 그것도 아주 고약한. 고약한 습관이 그렇듯 첫 번째 보다 두 번째가 더 쉽게 마련이고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늘기까지 해. 첫 번째 비밀은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지 하고 넓은 아량을 발휘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실수가 한 번에서 그치지 않는다면, 그래도 여전히 실수라는 말로 이해하고 넘길 수 있을까. 다 알면서도, 이미 겪어봤으면서도, 똑같이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내와 나는 열린 관계야.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서로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만나기로 했어 우리는.” 

일하면서 두어 번 만난 후에 그가 이 얘기를 했을 때만 해도 나는 개소리를 진지하게도 하는구나 싶었지.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어. ‘저런 얘기에 혹해서 넘어가는 사람이 있나 설마?’ 세상에, 그 사람이 나일 줄이야. 누워서 하늘을 향해 침을 세게도 뱉었다 내가. 술을 마시고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그 만남(역시 술이 문제야 응?) 이후 나는 어리석게도 비밀이 있는 관계에 또 빠지고 말아. 첫 번째와 비교했을 때 그 수위가 더 세졌다고 볼 수 있지. 그의 옆에는 애인이 아닌 아내가 있었으니까. 아내는 애인과는 다른 거잖아. 아내는 법적으로 관습적으로 의무와 권리가 있는 공식적인 관계이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괴로워. 좋았던 순간이 있었나 싶을 만큼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 물론 때로 좋은 순간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그때의 감정과 시간들이 모조리 흐리멍덩해. 그 관계 안에서 등장인물은 오직 그와 나 둘 뿐이고 만나는 시간은 늘 밤이고 함께 있는 장소는 나의 집 아니면 가게에서도 늘 구석진 자리, 그러니 온통 추억은 검고 까맣고 어두워. 

처음엔 나도 쉽게 생각한 것 같아. ‘가끔 만나서 외로움 더는 거지 뭐. 연애 말고 그냥 즐기는 거, 간편하잖아?’ 결과적으로 이번에도 누워서 침을 뱉은 셈인데. 계속 간편하길 원하는 줄 알았던 내가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있을 수 있는 더 많은 시간과 더 깊은 관계를 원하게 되더라고. 그렇게 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게 되었지. 나는 그 관계의 다음을 바랐어. 순간이 아닌 일상적으로 이어지는 시간과 관계를 말이야. 훤한 대낮에 만나 익숙한 골목을 걷다가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는 거. 혼자 카페를 찾은 날이면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누가 봐도 당연한 연인이자 누구에게도 떳떳한 그 관계를 말이야.  

어쩌면 그때 나에게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어. 비밀을 유지하거나 그 관계를 그만두거나. 그런데도 그 두 가지 선택지 말고 저기 멀리 있는 또 다른 선택지를 자꾸 찾았어. 혹시 모르잖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더럽게 시작한 관계도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도 하니까. 불륜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운명적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야. 그런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처럼 당신이 용기 있는 선택을 한다면 나는 험한 길도 기꺼이 함께 하겠다는 마음이었지.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건 더럽게 차가운 말 뿐이었어.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너도 다 알고 시작한 거였잖아?” 

가슴에 깊게 칼날처럼 박힌 이 말, 이 말을 뱉은 그의 끝이 없는 비겁함. 그 말이 어찌나 상처가 되던지. 너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 말은 따지고 보면 너도 피해자 쪽은 아니고 가해자 쪽에 가깝다는 선고 같았어. 가뜩이나 죄책감으로 구겨지고 작아진 내 마음은 그 말 때문에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도 될 만큼 더 닳고 더 더러워졌어. 그래도 이 말 덕분에 그 관계를 끝장 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거짓이었던 그 관계를 나는 더욱 엉망으로 만들고 찢어 버리고 망쳐 버리고 저벅저벅 걸어 나왔어.  


두 번째 비밀은 그 타격이 말도 못 했어. 우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어. 가족과 친구처럼 소중한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면서까지 유지하려고 했던 그 관계가 남긴 건 지독한 외로움뿐이라는 깨달음.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이것이었어.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나를 소위 정상적이라고 말하는 남녀 관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 말이야. 나를 좋아하는 건 앞으로도 이런 사람뿐일 거라는 생각과 결국 나는 멀쩡한 사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찬 두려움. 그게 너무 커서 때로는 숨이 막혔고 그럴수록 그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해 보이려고 굴었어. 두 번의 비밀을 경험하고 비밀에 집어삼켜진 나는 그 후로도 자꾸 비밀을 만들려고 들었고. 툭하면 술을 엄청나게 마시고 이곳저곳에 전화를 해대고 취하면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널을 뛰었지. “쟤 완전 술 마시면 딴사람이 되잖아?”라는 말도 참 많이 들었어. 그렇게 딴사람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만든 비밀을 잊거나 또 다른 비밀을 서둘러 만들어 비밀을 비밀로 덮어버릴 수 있었거든. 그래서 틈만 나면 취했고 틈만 나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위로를 가장한 또 다른 비밀을 만들려고 들었지.       


비밀은 힘이 세. 특히 남녀 관계에서 비밀은 한층 복잡하고 추잡 하지. 비밀스러운 관계의 위태로움 때문에 짜릿할 수는 있어.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위태로운 관계 위에 시간과 감정도 쌓이게 되지. 늘 흔들리는 바닥 위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그거랑 비슷해. 늘 어찌 될지 모르는 관계와 시간 속에 있는 것. 어차피 미래도 희망도 바란 적 없어, 그냥 이 순간이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순간순간도 그냥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  

그 관계가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결국 알려졌을 때 까발려지는 관계의 민낯, 그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들이 넘실대며 망가지고 파괴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 비밀이 얽혀 있는 이 관계에선 누구 하나 안전할 수 없고 그래서 미래를 꿈꿀 수 없어. 


두 번의 비밀을 경험하고 나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나를 용서할 수 있었어. 술을 멀리하고 나를 아끼려고 애를 쓰고 위험한 사람을 멀리했지. 왜 그랬을까 하는 답 없는 질문을 되풀이하는 것을 그만두고, 지난 시간을 후회하기보다 미래를 생각하기로 했고. 비밀이 없어서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생활을 통해 나는 내 인생을 그리고 내 미래를 내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해. 심심해도 괜찮고 뻔해도 괜찮을 만큼 나의 하루하루가 충분히 만족스러워. 

이게 내 다음 사랑은 벌건 대낮의 사랑이어야 하는 이유야. 

내 사랑에 더 이상 비밀은 없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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