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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민정 Mar 06. 2024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책은 나를 지탱해 주고 영화는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세계를 일깨워준다. 나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매우 특별하다. 그의 영화에는 인물들과 이야기, 풍경에서 관객의 자리가 있는 듯한 여백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야기를 경험하며 그동안 지나치거나 미처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셋째가 다른 형제들의 눈을 피해 방에서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장면에서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모르겠다. <브로커>에서 보육원 동생을 만나고 나서 홀로 계단을 올라가는 동수는 한숨조차 조심스럽게 쉬었다. 이 땅에서 공중으로 멀리 떨어진 관람차에서 눈이 가려졌을 때, 아마도 소영은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대면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그리고 상현은 이제 조금은 더 행복해졌을지...... 이런 생각들이 계속해서 문득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고 지난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나서 <브로커>가 갑자기 다시 보고 싶어졌다. <브로커>를 처음 봤을 때는, 아기 우성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너무 집중하느라 인물들보다 영화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에 계속해서 따라갔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존재로 <브로커>의 각 인물들을 다시 보자, 처음 봤을 때보다 마음이 더 저릿했다. 나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이런 식이다. 


영화로 충분히 와닿았기에 굳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책을 찾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서가에서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제목에 눈이 먼저 갔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이 '참 고레에다 히로카즈답다'라는 생각이 들며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출판할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일상에서 섬세하게 기록한 글을 읽으며, 어떻게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좀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영화와 꼭 닮은 단정하고 따뜻한 글들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기억하고 싶은 몇 문구를 남겨본다.


[감동보다 사유를]에서

미디어 종사자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 속에서 스스로를 보려는 자세일 것이다. '대체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 이 물음을, 옴진리교를 낳은 지금의 일본 사회를 다시 생각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미디어는 바로 그 사유를 위해 기능해야 한다.
영상 제작자(전달자)는 시청자에게 그런 사유를 요구하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
거울을 앞두고 철저하게 사유할 필요가 있다. 교단도, 미디어도, 사회도,
감동보다 사유를 추구하는 냉철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개혁도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1999년 11월)

[모놀로그와 다이얼로그]에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생각했지만, 제 경우는 취재 대상에게
제 쪽에서 무슨 행동을 취해 상대의 상처를 후벼 파기보다 '듣는' 자세로
그저 곁에 있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상대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귀로서 거기에 존재합니다. 어디까지나 수동태, 리액션이죠. 극영화를 연출할
때도 역시 기본적인 자세는 변함없습니다. 배우와 스태프에게서 나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이 방식에 대해, 그런 수동적인 자세로는 작품을 못 만든다고 비판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어려운 행위라는 것을
 최근 들어 깨달았습니다. 듣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만약 상대가 없었다면
혼잣말(모놀로그) 혹은 말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이 대화(다이얼로그)가
됩니다. 토론이란 '말하는' 기술을 겨루는 일이겠지만, 뭔가 그것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듣기'라는 행위, '상대의 마음이나 생각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지금 사람들이 가장 잃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 저는 '자기표현'이라는 말에서
모놀로그적인 '일방통행'의 냄새를 감지하는 거겠지요.

영화 촬영을 다시 시작합니다. 배우와 저와의, 작품과 저와의, 작품과 관객들과의, 그리고 저와 봐주실 분들과의 풍요로운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을 목표로요.
(2003년 3월 25일)

[언행불일치]에서 

아키 씨는 메일에서 "반대만 하는 건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달리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으셨는데, 지금 그 질문에 대답한다면
'그럼에도 끝까지 계속 반대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도 쓰고 있습니다.
사실 '계속 반대하는'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2004년 2월 26일)

[귀를 기울이는 법]에서

'말'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대에게 가닿을 말로 이야기하는 건 웬만해선 힘들다고 생각해요. 저는 다큐멘터리란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행위라는 것을 방송을 만들기 시작하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극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겠지요. '상대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철저하게 상대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테면 제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과 상대가 쓰는 '희망'이라는 말이 과연 같은 의미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다릅니다. 거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인생을 걸어왔고 상이한 가치관으로 살았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다르다'는 것이 대전제이고 그 위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해 나갑니다.
작품화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눈앞의 타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상대까지 덮어버리지는 않았나, 즉 자기표현의
부품으로써 적절한 코멘트만 잘라내어 이쪽 세계에 봉사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조작'도 이런 행위의 일종인 경우가 많은데, 그리되면 더 이상
다큐멘터리를 찍는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만남도, 발견도, 자기 개혁도, 커뮤니케이션도 생겨나지 않을 테지요. '상대의 언어로 말하려는 것'
'상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 거기서부터 자신의 문체를 형성해 나가는, 
일견 멀리 돌아가는 듯한 행위 속에서 다큐멘터리는 반짝임을 발견합니다. 

[영화가 변하는 게 아니라 제가 변합니다]에서

저는 제 커리어를 직선적으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앞으로 나아간다는 식의 '직선'으로는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스스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깨닫게 되는 건
슬퍼하는 것보다 분노하는 게 더 강할 수 있고,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다, 확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 책에서 "나를 만든 영화 66편"에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가 나와서 옛날에 그 영화를 봤을 때의 애틋함과 흥미진진함이 되살아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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