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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5. 2017

비록 어색하다 할지라도

영화 호수의 이방인 Stranger by the Lake, 2013 

안녕 엄마Hi, Mom!, 1970

최근엔 고전영화들이 재개봉 열풍이 불고 있다. 배급사 입장에선 비싸게 영화를 살 필요가 없고, 판권을 가진 제작자나 배급업자는 죽어있는 영화에서 다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과거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보려면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인 과천도서관을 가거나, 더 귀한 영화라면 상암에 있는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대여신청을 해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오즈 야스지로'의 회고전을 하기도 한다. 히치콕의 대표작들이 재개봉하는가 하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복원된 필름들이 감독판이라는 명목으로 재개봉되고 있어 극장에서 영화를 택하는 폭이 넓어졌다. 최근 그렇게 본 영화가 <러브레터>, <블루 벨벳> 같은 영화들이다.

어릴 적엔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기면 무조건 동네 비디오 가게를 찾았다. 비디오 가게 알바 형이랑 몇 시간 동안 영화발전을 위한 대담을 나누다가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빨간딱지 영화를 뽑아오곤 했다. 영화가 지천인 세상에 살다 보니 수고로운 애틋함이 증발해버렸다. 아버지와 소파에 누워서 허벅지를 긁어가며 보았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같은 영화는 이제 없다.


최근 <동경가족>과 <동경이야기>를 동시에 보며 느낀 점은 일본인들은 지나치게 예의가 바르다는 점이다. 서로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지나치게 예의를 갖추는 일본의 가족들이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족이 뭐 저래? 문화적인 차이지만 이상하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측면에서 일본인들의 과도한 예의바름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게 가족이라면 좀 더 무심하고, 툭툭 말을 던지는 것에 익숙하니까. 내게 예의범절은 가족의 벌어진 사이를 의미하는 간극처럼 느껴졌다. 딸의 여자 친구에게 감사하고 고맙다며 고개를 조아리거나, 가족 간의 평범한 대화에도 고마움의 인사를 빼먹지 않는 장면엔 동경이 가진 차가운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다. 유독 한국에서 일본 영화가 인기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사소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오랜 시간 동안 일본과 옆동네에서 샛강을 끼고 살았지만, 아직도 그들과 상상 이상의 거리감을 가진 건 아닐까.

동경가족 2013(리메이크작, 우측), 동경이야기 1953(원작, 좌측)

난 한국영화 <신세계>를 좋아한다. <무간도> 짝퉁이네, 클리셰 범벅이네 말도 많지만 그 정도 퀄리티의 누아르 영화 본지가 언젠가. 익숙한 스토리에 어디서 본 듯한 시퀀스들을 눈감아 줄 만큼 인상적이다. 사실 신세계 속 조폭문화와는 한국과는 다른 별다른 것이 있다. 특히 기업형 조폭 내에서의 권력다툼은 너무나 전형적인 스콜세지식 패밀리형 조폭이고, 내부 경찰 잠입 이야기는 무간도가 모두 다 훑어버린 장르가 아니던가. 하지만 영화가 힘을 내는 부분은 관객이 모두가 즐겁게 즐겼던 과거의 클리셰들을 솜씨 좋게 짜깁기해서 무던하게 입을 수 있는 하얀 티셔츠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경가족>이 일본과의 문화적 이질감에 영화적 재미를 감소시켰던 것에 비하면, 우리가 얼마나 90년대 이후 헐리우드와 홍콩의 영화에 익숙해져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은 일본의 작품들인 애니메이션들이 상대적으로 이질감 없이 다가오는 것만 봐도 익숙함과 어색함은 반비례함을 알 수 있다. 신카의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말할 필요도 없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한국에서 영화와 다르게 큰 성공을 거뒀다. 일본 영화는 한국에서 히트작이 거의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의 삶 속에 내밀하게 편제된 정서에 마음을 주기 어렵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작 <명량>엔 일본인들이 극악무도한 악당(당연하게도)으로 등장한다. 몇몇 일본군이 사무라이처럼 입고서 이순신! 이순신! 을 외치다가 처참하게 죽어나간다. 일본인들은 이 영화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한국인들은 일본인을 무뚝뚝한 표정으로 야비한 웃음이 나 짓는 원숭이처럼 생각하는구나. 아마도 이런 생각들을 비껴가기 어려울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악역에도 매력적인 구석이 있어야 영화가 재밌다고 믿는 사람이다. 명량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라 전쟁의 상대국인 일본군을 악으로 그릴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량>의 가장 큰 단점이 매력 없는 악역이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저 한국의 극적인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입체성이 없는 악역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 무지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영화는 일본이라는 거대한 몸체의 일부분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적대시하고, 절대 악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며 마음껏 살육을 베푼다.

호수의 이방인L'Inconnu du lac, Stranger by the Lake, 2013

<호수의 이방인>(Stranger by the Lake, 2013)이라는 영화가 있다. 몇 년 전 부산영화제에 가서 본 퀴어영화다. 퀴어에는 게이나 레즈비언, 양성애자들을 뜻하는 의미도 있지만, 전적으로 소수자를 칭하는 문화 형성을 말한다. 알랭 기로디 감독은 호숫가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 넘치는 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를 통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수상과 함께 전 세계적인 팬을 거느리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부산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접했을 때,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남성들의 섹스신에 몸이 불편했다. 사실 영화를 본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이 영화가 국내 개봉에 실패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분개한다. 한국에 제한상영관이 없는 상황에서 제한상영가 등급 판정이 웬 말인가. 낯설어 불편하고 그래서 이해하는 과정으로 갈 마음이 없다면 영화는 보잘것 없어진다. 이런 처사는 결국엔 지속적인 소수자에 대한 폭력 어린 시선을 관장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문화, 그들의 생각, 그들의 사고를 이해할 필요성을 영화를 통해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이해의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영화라는 2시간짜리 콘텐츠가 대리해서 줄 수 있는 경험은 매체 고유의 장점이다. 가보지 못한 곳을 가고, 그들의 문화를 접하며 이해를 넓혀나가는 미덕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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