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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2. 2017

잃어버린 숙면을 찾아서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2013

건강한 사람이 잠을 잘 잔다고 한다. 하지만 내 경우엔 아니다. 난 잔병치레 없이 늘 건강하지만, 잠드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 청할 때면 상상의 구렁이가 내 수면 패턴을 망쳐놓는다. 별별 상상은 곧 불안과 혼돈으로 바뀌고 내 밤은 끝날 줄을 모르고 지속된다.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해도, 전날 세 시간밖에 안 잔 상태임에도 잡념의 비빔밥은 소화되지 않는다. 잠이란 게 따듯한 욕조에 몸을 뉘일 때처럼 몸으로 젖어드는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날 괴롭히는 성가신 기억들은 내 머리에서 냉수마찰을 한다. 그런 날은 내 성난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러시아 소설을 처방한다. 우선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루해진다. 카라마조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아 잠이 온다. 도시 이름도 어렵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심지어 마을 이름이 스코토프리고니 예프스크라니 러시아 소설은 내 의식마저 졸음으로 마취시킬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존재든 다 자기 쓸모가 있는 법이라고 러시아 소설은 바로 수면을 위한 과학이다. 물론 두꺼운 소설책을 끼고 자는 밤은 낭만적이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2013

가끔 친구들과 술을 먹고 같은 방에서 잘 때가 있다. 술은 몸을 노곤하게 하고, 방에 들어가 맥주를 좀 마시면 바로 졸음 경보가 발령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난 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뒤척인다. 그럴 때면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의식을 잃고 좀비처럼 골골대며 처자는 친구들이 부럽다. 이런 무신경한 새끼들. 녀석들은 씻지도 않고 몸을 누인지 10초 만에 코를 골며 잠이 들어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면 늘 노트북을 켜고 블로그질을 한다. 지금 떠오르는 잡념들을 적다 보면 시간에 물이 흐르고, 글은 술술 넘어간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글에 배설하면 개운한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다. 내 경우 불면의 원인이 없는 만큼 굳이 졸음과 타협하려 하기보단 글을 쓰며 달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블로그 속에서 펼쳐놓는 이야기에는 나를 다독여주는 심은하의 미소가 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웃고 있을 뿐이지만, 그저 내 글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난 위로를 받는다. 여름날 샤워하고 선풍기 앞에서 알몸으로 블로그를 쓸 때 가장 글발이 잘 받는다는 노하우도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최근에 기분전환할 겸 내 방 가구 위치를 바꾸다가 침대를 창가 옆으로 옮겼는데, 이상하게 그날부터 간밤에 꿈을 꾸기 시작했다. 불쾌한 꿈이라면 얼른 다시 침대 위치를 복구했겠지만, 이상하게 기분 좋은 과거처럼 아련한 망상이었다. 가령, 버려진 고양이를 주어왔는데 그 고양이가 알고 보니 말을 하는 재주가 있어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하는 그런 꿈도 있었다. 마치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처럼 고양이가 내게 뭔가를 계속 충고했다. 내 경우엔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꽤나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2013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엔 최면을 통한 치료기법이 등장한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의식의 흐름이라는 심리학 기법을 통해 장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던 것처럼, 영화에서는 최면을 통한 의식의 전환이 큰 물줄기로 인물을 구원하는 동아줄이 되어준다. 

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말을 잃고 사는 폴은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프루스트 여사의 최면치료기법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상처에 직접 접근한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못 하고, 그 당시의 기억이 지워져 버린 폴은 자신의 의식 안에서 상처로 자리 잡아있던 부모에 대한 다른 기억을 발견하게 되고, 무의식이 연상 작용이 예술작품의 영감이 떠오르는 과정과 유사한 형식으로 조합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영화는 전개된다.

재밌는 점은 프루스트가 그녀의 집에서 처방받는 약이 마담 프루스트가 직접 재배한 찻잎이라는 점이다. 이는 전적으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인용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폴에게 필요했던 건 그저 숙면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이니 치유이니 다 필요 없고, 그저 잠이 들 수 있는 환경이 그를 치료한 것이다. 폴은 정신 사나운 할머니와 그녀들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폴의 말을 하지 못하는 실어증은 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막혀버린 일상의 환경에서 기인한다. 영화의 연출도 그에 부합하게 폴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요란스러운 연출을 통해 그를 궁지로 몰아넣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반면,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에서는 예술적 영감이 충만한 시간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에게 있어서 편안한 잠자리와 그에 수반되는 꿈이라는 영역이 실제 의식의 영역보다 더 중요한 삶의 활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꿈처럼 아름다운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내게 잠을 청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는 러시아 소설과 상상 속의 그녀 그리고 꿈에서 등장하는 고양이까지 다 마찬가지다. 어쩌면 폴이 마시는 허브차와 마들렌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선물한 수면제가 아니었을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Attila Marcel, 2013

결국 폴은 최면치료를 통해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던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그는 비록 최면치료 중 손을 다쳐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제야 비로써 행복한 인생을 위한 선택지를 손에 쥔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느리고 무엇보다 말이 없으며, 상상으로 이루어진 장면들 역시 몽롱하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려는 목소리와 주제의식이 누구나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치 숙면처럼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정신없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하루를 잘 마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한다. 거기에 1년 길게는 10년 단위의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부지런히 세운다. 하지만 결코 날 이루어온 과거와 내 뱃속 서랍 안에 감춰진 무의식의 영역까지 손을 뻗치려는 노력은 없다. 다소 계몽적 일지 몰라도 목적을 향한 독주에 가끔 제동을 걸어주는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난 영화의 가치를 몸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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