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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2. 2017

밥벌이의 지겨움

모스트 원티드 맨 A Most Wanted Man, 2014

희미한 기억이지만 어릴 적 아버지와 '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라스트맨 스탠딩>을 보러 간 기억이 난다. 20년은 된 기억인데 이후로 충무로를 찾지 않았다. 그간 충무로역과는 갈아타는 정도의 관계만 맺어 왔다.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러 대한극장을 가는 길에 찾은 충무로역은 예전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몇몇 곳에서 목을 축이고, 알듯 모를듯한 영화사가 개최하는 오디션 현장을 구경했다. 선술집의 분주한 광경과 과거에도 찾았던 국수집도 그대로였다. 그중에서도 대한극장은 오랜 역사를 가진 공간답게 정겨웠다. 건물 지하의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모스트 원티드 맨> 줄거리 : 어느 날 독일 함부르크 정보부 요원 군터에게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 출신의 모슬렘 청년 '이사'가 나타난다. 그가 찾는 아버지의 유산이 알고 보니 러시아 마피아의 비자금이라는 첩보를 입수한다. 이사를 돕는 인권변호사(레이철 맥애덤스)와 은행장(윌렘 데포)을 정보원으로 포섭한 귄터는 이사를 미끼 삼아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를 테러의 흔적을 추적해나간다.
A Most Wanted Man, 2014

<모스트 원티드 맨>의 군터(호프먼)는 베를린에서 스파이 생활을 하다가 작전상의 실수로 독일 대테러 정보부서에서 일하게 된 정보 전문가다. 권태와 긴장을 동시에 품고 사는 군터는 담배와 술을 달고 다닌다. 영화의 중반 작전의 수행을 위해 미 CIA 요원과 카페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다. 군터로선 미국 측 불신으로 자신이 행하는 작전이 좌초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말을 눙치고 상대를 설득해서 자신의 편으로 돌려 넣어야 하는 사뭇 긴장되는 장면이다. 주위를 살피며 대화를 나누던 군터는 자신의 의지대로 대화가 풀리지 않자 안주머니에서 늘 마시던 럼주를 커피에 타 마신다. 그에게 있어서 술은 직업적인 고통을 줄여주는 묘약이자, 후회로 미적거리던 과거와의 이별을 고하는 작업이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눈을 찡그리고 마법의 묘약을 흡수하는 군터는 한 모금 축인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커피를 하루 종일 마시는 한국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추운 날씨를 극복하려 럼주를 즐겨 마신다. 군터에게 럼을 탄 커피란 자기방어의 기재 정도로 보인다. 그건 아마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인상적인 작품인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가 가진 잔상(기계 연료를 섞은 독주로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들)이 주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필모그래피에 드리워진 어둠을 일정 부분 공유한다.

A Most Wanted Man, 2014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살펴볼 다른 관점은 첩보라는 방대한 범위 내에서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직접 뛰어다니는 각 국 및 기관 스파이들의 활동이다. 영화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건에 스파이를 심어 조직의 손아귀에 움켜쥐는 요원들의 아귀 싸움을 통해 긴장을 이어나간다. 어느 늘 갑작스레 나타난 '이사'라는 청년은 군터에게 굴러들어 온 선물이다. 우연히 함부르크 공항에서 밀입국한 이사를 발견한 군터는 그가 테러리스트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닥터 압둘라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미끼 역할에 적임자임을 간파한다. 이사는 아버지(테러리스트)에 대한 분노와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원초적 욕구(더러운 유산의 상속을 의미)를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몇 가지 패를 뒤적이던 군터는 이사를 자신의 편으로 회유함과 동시에 관련자들과 상생할 수 있는 타협안을 마련한다. 

총격전과 화려한 카체이스 액션이 고픈 영화팬이라면 다소 답답할 수도 있다. 한 인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믿음을 이식하는 심리전과 고달픈 하루 일이 주는 피로감은 대다수의 관객이 스파이 영화에 원하는 덕목이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기관의 정보요원들이 작전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누가 팀원이고, 누가 정보원인지 헷갈려하는 혼란 또한 '존 르카레‘의 이야기가 가진 묘미다. 이 극한의 긴장 속 정가 운데서 군터는 술과 담배를 통한 쉼표를 마련한다. 영화 곳곳에서 권태로운 표정으로 뻐금 뻐금한다. 어떤 생각을 할까. 상대에 대한 믿음이 불의 불식 간에 살아나는 걸까.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심연처럼 다가올 때 술은 약이 된다. 

A Most Wanted Man, 2014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가장 극적인 지점은 인권 변호사 애너벨(레이철 맥아덤스)과 은행장 토마스 브루(윌렘 데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 있다. 텅 빈 공사장에서 애너벨에게 흑심을 품은 토마스 브루를 몰아붙이는 대화 신은 그 자체로 압도적이다. 애너벨을 감금하고 그녀의 약한 본성을 자극해 회유하는 장면 역시 별다른 대사가 없이도 관객을 옥죈다. 마치 국지전과 대륙 전에 모두 능한 장수처럼 군터는 심리전을 펼친다. 밤낮없이 밀폐된 사무실에서 도청과 몰카의 결과물들을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하며 때에 따라서는 사람을 납치해 협박하면서 군터는 자신이 목표물에 거의 근접해졌음을 느낀다. 

스파이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의 가정이다. 이제 나이 지긋한 군터는 이혼해 가정과 격리된 남자다. 중년의 남자에게 가정은 절대적인 행복의 척도이자, 삶의 질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퇴근하면 양말을 벗어던져놓고 소파와 한 몸이 되는 우리 아버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매일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고, 입던 옷만 입고 다니는 배 나온 중년 군터는 007이 아니다. 그는 운동을 싫어하고, 그렇다고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스파이답게 가정과 친구 대신 일과 그에 따른 부수적 화두에만 온 관심을 기울인다. 같은 작가의 손으로 탄생한 대표적인 중년의 정보부원 ‘스마일리’와 비교해 봐도 유독 군터는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처럼 보인다.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남자를 본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지만,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가정과 미래에 등한시한 그를 결코 멋진 스파이라고 칭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모든 작전을 의도대로 수행시킨 군터는 성공을 예감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다시 군터를 실패자로 만든다. 마치 그가 작전상의 실패로 베를린을 떠나 함부르크로 왔을 때처럼. 상실감과 비현실적인 절망감 앞에서 우두커니 선 호프먼의 마지막 모습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의 처지와 겹쳐져 기이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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