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Jan 17. 2017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

동경가족 東京家族, Tokyo Family, 2013

퇴근하고 혼자서 영화관을 갔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혼자 온 남자들이 많았다. 내 양 옆 좌석에 자리 잡은 두 남자는 가뜩이나 큰 덩치로 나를 압박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꽤 많은 남성들이 이수역 '아트나인'의 작은 상영관을 채우고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아닌가. 내가 예술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놓치기 쉬운 귀한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희열이 가장 크다. 거기에 보너스로 멀티플렉스와 달리 사람이 적어 여유 있게 영화에 흠뻑 젖을 수 있다는 장점이 더해진다. 그런데 오늘 평일 저녁(사람이 없어야 자명한) 일본의 거장 '야마다 요지'의 <동경가족> 상영관에는 그 어느 영화보다 많은 남성들이 홀로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 때문에 이 남자들을 찾게 했을까. '오즈 야스지로'의 불세출의 걸작 <동경이야기>의 리메이크 작품이기 때문일까. 절대 그럴 리 없지, 오즈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조용한 가족영화이자 내용 또한 현대사회의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이 잔잔한 냇물 같은 영화에 흥행 포인트란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술 먹기 좋은 목요일 저녁 그들은 무엇을 찾아 이 영화관을 왔을까. 그 비밀은 영화를 보는 중에 풀렸다. 이 영화의 배역진을 확인하지 못했던 난 상영 도중 살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경가족 東京家族, Tokyo Family, 2013
외딴섬에 사는 노부부는 장성한 자식들을 보러 번잡한 도쿄를 찾는다. 자식들은 오랜만에 만난 부모 모시기에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적극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병원 의사인 아들과 미용실 주인 큰딸은 생활이 바빠 부모를 신경 쓰지 못한다. 막내아들도 자기 생활에 치여 부모를 챙길 여력이 없다. 부모가 부담스러운 자식들은 결국 돈을 모아 호화로운 관광호텔에 두 분을 모시기로 한다. 하지만 자식들의 예상과 달리 가족들 간의 아늑한 시간을 꿈꿨던 부모는 실망하며 갈 곳 없는 처지가 된다. 결국 어머니는 생각 끝에 촐랑대는 막내아들이 생각나 빨래와 청소나 해줄 겸 찾아가기로 한다.

부모님께 걱정만 끼치는 철없는 막내아들 쇼지(츠마부키 사토시)의 혼자 사는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자 친구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시작된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장면을 보다가 현관에 나타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후 모든 의문을 풀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 옆 좌석의 남성들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 고요한 들썩임에 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온 것이다, 아오이 유우, 한국의 남성에게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녀가 이 영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 예술영화관에도 온난화가 왔다. 영화에 푹 빠져있던 나는 이 오타쿠들과 한 묶음에 섞이게 된 것이 꽤 재미있었다. 하늘거리는 옷차림과 민낯의 수수한 얼굴에서 나오는 빛나는 미소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 사실상 지루하고 무거운 이 작품의 후반부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두 청춘스타 '츠마부키 사토시'와 '아오이 유우'의 청량한 매력 덕분이다. 더 나은 일본의 미래를 그려보려는 작품의 의도와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다.

동경가족 東京家族, Tokyo Family, 2013

영화는 부모와 자식 간 단절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먹고살기 바빠 소원해진 관계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떠벌이는 내게 면박을 주는 영화다. 이야기의 전형성 속에 섞여 들어간 자식의 무례와 부모에 대한 죄송스러운 감정이 어쩐지 남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기성세대가 현세대를 바라보는 마음에서 느껴지는 막연한 불안감에 기인한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섣부른 기대를 보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낙담한다. 국가적 재난상황에 노출되어 큰 상처를 받은 일본 사회의 근심엔 현 시국의 한국이 받은 상처와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옆자리 남자는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러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흑흑 대며 암흑 속을 빠져나갔다. 주책이다 주책, 나이 먹어서 무슨 추태냐. 난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올 때까지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다 나왔다. 상영 전 먹은 햄버거가 속을 거북스러게 했다.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크랭크인을 20여 일 앞두고 3.11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다. 큰 재해는 일본 사회를 침묵으로 빠뜨렸으며, 일본은 주요 부품이 빠진 고철 기계처럼 삐걱댔다. 야마다 요지 감독은 영화의 개봉을 연기하고, 새롭게 각본을 썼다. 그 결과 노부부의 한 지인이 3.11 사태로 부모가 실종되었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막내아들 쇼지는 대지진 피해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하다가 여자 친구 노리코를 만나게 된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 영화가 원작의 감독인 '오즈 야스지로'의 세계와 다른 노선을 가는 지점이 바로 이 재앙 후의 일본을 다루는 태도다. 극복의 기운이라 칭할 수 있는 북돋움의 대사들이 침잠하는 이야기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오즈가 순환이라는 알레고리를 강조하며 어쩔 수 없이 변해가는 세월 속에 세월 무상의 쓸쓸한 정조를 남긴다. 그 반면 야마다 요지의 연출은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피해가지 않고, "어딘가 이 나라는 잘못돼가고 있다"라고 한탄한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어린 나이에 벌써 포기한다"며 쓴소리를 주저앉지 않는다. 부자연스러움을 무릅쓰고 노감독의 기개로 젊은 세대들에게 연설을 늘어놓기도 한다. 낡은 일본에게 힘을 주려는 다소 도식적인 전개가 내 눈에는 영화의 선의처럼 느껴져 미덕으로 보였다.


hisaishi joe, 영화 동경가족의 음악감독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다소 영화의 무게감을 기름을 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의 연주곡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떠올리게 하는 장대한 멜로디를 뽐낸다. 아 내가 참 오랜 시간 동안 히사이지 조의 음악을 좋아했구나. 그의 익숙한 멜로디 라인이 귀에 들어오자 마치 오랜 친구와 정종 한 사발 하는 듯 푸근함이 느껴졌다. 그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연주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아롱아롱 떠오른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속 남자들의 밀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