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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5. 2017

은은한 감정의 밀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Like Someone in Love, 2012

2016년 7월 4일 세상을 떠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님을 그리며 이 글을 적습니다.


가끔 무료할 때면 책장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을 고른다. 침대에 발라당 누워 읽기 좋은 하루키 수필은 어쩐지 무료함과 잘 어울린다. 작가 자신이 수필을 심심하게 작성하기 때문에 읽는 이마저 방심한 채 책장을 넘긴다. 수필 자체에 뭔가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없고, 특정한 메시지를 주겠다는 강박도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는 가벼운 글이라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 제격이다. 가끔은 기승전결을 강요하는 세상에 제동을 걸고 싶어 지는 법이니까. 인생을 향한 푸념과 불평도 어느새 스르륵 빠져드는 낮잠처럼 녹아내린다. 하루키 수필은 어쩌면 무용해서 유용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어제 읽은 수필에선 이발소와 목욕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발소를 가고, 목욕탕에서 오랜 시간 동안 앉아있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내용이다. 가히 그렇다 분명 이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목욕탕과 이발소를 질색했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그렇듯 굳이 집 화장실 놔두고 부끄럽게 알몸으로 남 앞에서 씻는 것이 싫고, 동네 미용실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머리를 이발하는 시간은 낭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요즘은 이발이 기분전환을 해주더라. 2주에 한 번씩은 머리를 맨질맨질하게 하고 뿌듯함을 느낀다. 오래 묵은 때를 벗긴 듯 개운한 마음으로 목욕탕에 간다. 과거엔 샤워만 하고 탕에서 몸을 불리진 않았다. 하지만 요즘엔 탕에서 30분 정도 몸을 뉘이고, 후끈한 몸으로 커피우유를 마시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마치 바둑을 배우면 그 지루한 바둑중계를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반면 퇴색해져 가는 감정과 기운들은 내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린다. 영화와 소설은 그런 점에서 인생과 비슷한 개체다. 내 인생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Like Someone in Love, 2012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영화를  본다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거장이다. 새로운 영화적 형식을 실험하는  있어서  적극적이고, 이란이라는 문화 배척지에 영화라는 샘을 파낸 위대한 예술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실 그의 작품들을 싫어했다. <> <체리 향기>, <사랑을 카피하다> 모두 지루했다. 낯선 형식은 접하는 이에게 불편함을 주고, 무언가를 응시하는 영화적 공백이 많은 그의 작품은 지루함을 가져왔다. 하지만 시간이란  내게도 그의 영화를 즐길  있는 나긋함을 선물한 걸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최신작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 2012) 그의 영화 세계에 내가 관심을 두게   작품이 되었다. 대체로 아늑하고, 가끔씩 섬뜩하기도   작품은 키아로스타미의 세계가 변화하는 만큼, 내가 영화를 즐기는 관점도 전과 달리  느긋하게 변모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영화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도쿄의 고급스러운 바에서 돈을 받고 남자들을 상대하는 콜걸 아키코, 그녀의 비밀스러운 일상을 모른 채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 친구 노리아키 그리고 그날 밤 아키코를 콜걸로 부른 노교수 타카시(음흉한 할아범)다. 어느 날 밤 아키코는 할머니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한 체 일을 하기 위해 울적한 기분으로 타카시 할아범의 집으로 간다. 오래전부터 자신을 아는 듯 대하는 타카시와 이야기하며 편안함을 느낀 아키코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며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아키코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가려던 참에 타카시는 우연히 그녀의 남자 친구 노리아키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는 노리아키의 집요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결국 거짓은 돌멩이가 되어 창문으로 날아들고, 와장창 깨지는 순간 영화도 끝이 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 2012

이 단순하고 미니멀한 이야기에서 감독은 무엇을 찾으려고 한 걸까. 그리고 난 무엇에서 매혹을 느낀 것일까.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멀고, 몽롱한 아늑함이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점 때문일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은 대체로 승용차에서 이루어진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도쿄의 풍경은 화려하지만, 아키코의 얼굴엔 슬픔이 스며들어있다. 화려한 도시의 빛이 차창으로 투영되어 아키고의 슬픔을 가린다. 웃음을 팔아 돈을 벌고, 미래를 지불하는 이 여자는 오늘 무척 피곤해 보인다. 영화의 시작부터 자주 등장하는 도시 속의 창문들은 실제 감정과 겉모습의 이중구조를 묘하게 뒤섞는다. 상대의 얼굴을 믿을 수 없고, 대체적으로 진실과 거짓이 구분이 가지 않는 영화의 모호성과 닮아있다. 감정의 진짜와 가짜는 하나의 유리막을 앞에 두고 망설이며 다가올 뿐이다. 그래서 웃으면 웃을수록 공허하고, 성심성의 것 말하는 상대에게 이면의 거짓을 떠올린다. 키아로스타미가 바라보는 현대 도시의 사랑이란 바로 그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인간들의 군상일지도 모르겠다. 워낙 의뭉스러운 감독이라 그 뜻을 감히 집작조차 하기 어렵다. 다만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확신할 수 없는 느낌들을 마주할 뿐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생각했다. 아 난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영화를 정말 사랑하고 말았구나. 알 수 없는 생경한 영화적 운동이 내 마음을 온통 매혹으로 물들였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Like Someone in Love, 2012

과거엔 영화에 드러나 활활 살아 숨 쉬는 1차적 감정을 영화를 보는 사명으로 여겼다. 그 에너지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를 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인물의 2차적 감정(사건의 여파)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 그 에너지가 미약하다 할지라도 연출자가 의도적으로 관객을 끌어내기 위해 해놓은 장치들에 기꺼이 동화되는 감정이 소중한 것이다. 예전엔 부가적이라고 쉽게 떠들었던 미장센과 음악도 이제는 영화를 즐기는 한몫으로 마주한다. 영화에 기여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영화는 단순히 서사의 활동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느꼈을 때, 그곳엔 영화라는 마법이 존재하다고 믿는다.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거짓말을 눈치 첸 남자 친구 노리아는 평온한 영감의 집 창에 돌을 냅다 던진다. 와장창, 어제까지만 해도 콜걸을 불러서 미술작품에 관해 품평했던 이 우아한 공간도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 숨죽이고 몸을 사려 이 위기를 무사히 넘어갔을까. 아니면 멱살이라도 잡혀 경을 쳤을지도 모르지. 영화 속 내내 마치 유리막이 낀 듯 힐끗힐끗 보였던 감정의 파장들이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현실 속으로 날아든 돌멩이에 의해 깨어진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복제가 현실을 뛰어넘고, 역할이 실존을 넘어서는 순간에 대한 마법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자 이제 극장을 나서세요. 현실로 복귀할 시간입니다.

삶은 너무 은밀한 것이기 때문에, 영화는 삶을 완벽하게 복제할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다. 나는 영화감독으로서 ‘인생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조금 더 현실과 근접한 대답을 제안할 수 있을 뿐이다.
Abbas Kiarostami (1940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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