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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6. 2017

'라스 폰 트리에'의 조롱

님포매니악 볼륨 1,2 Nymphomaniac: Vol. 1,2

혼자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켜놓고 유럽축구를 본다. 굳이 카페에서 왜 자그마한 노트북 화면을 띄우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까지 유럽축구를 봐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변이라면 커피를 마시를 마시면서 축구를 보는 것만큼 평온한 광경이 있을까. 와이파이 빵빵 터지는 아늑한 카페에서 유럽축구를 띄워놓고 흥미가 떨어지면, 책도 읽고 블로그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경기가 재밌어질 때쯤 다시 선수들의 경기를 관람한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난 남들이 열심히 뛰는 걸 볼 때 쾌감을 느낀다. 특히 축구경기는 몸과 몸이 부딪치고 생생한 중계화면을 향해 달려드는 육박 감이 온몸을 꽝꽝 울리는 기분을 준다. 내 활동 욕망을 대리하는 우리 메시나 손흥민을 비롯한 선수들 힘내요.

지난 주말도 어김없이 손님이 거의 없는 여의도의 한 카페에 가서 늦게까지 유럽축구를 관람했다.(여의도는 24시간 카페가 많고, 덤으로 조용하다) 경기도 재밌었고, 손흥민도 골을 넣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골이 들어가는 순간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심 아뿔싸 했지만, 어색하면 더 쪽팔릴 것 같아서 기지개를 켜는 척하면서 마치 졸려서 그런 것처럼 되지도 않는 연기를 했다. 주위 분들도 저런 놈도 있구나 하며 나를 별 뜻 없이 바라봐주더라. 사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얜 또 뭐야’가 있는데, 나 정도는 그냥 스쳐지나갈 법하다.


요즘 본 영화 중에 제일 '재미없었던' 영화는 님포매니악 볼륨 1,2였다. 볼륨 2는 볼 생각이 없을 만큼 볼륨 1이 별로였는데, ‘라스 폰 트리에’와 다년간 쌓인 의리로 관람했다. 제일 큰 불만은 영화가 영화답지(?) 못하고 그저 스포츠 중계처럼 섹스를 묘사하는 게 고작이라는 점이었다. 섹시하지 않은 섹스신이 과연 존재가치가 있을까. 더 독했던 점은 영화에 감정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님포매니악에는 섹시하지 않은 섹스와 텅 빈 멘트들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영화평론가들은 어떤 의미와 추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굉장할 거다), 굳이 색정증 여성의 일대기를 넓게 해석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섹스신이 잦아지니 주인공에 대한 매력도 떨어지고, 그저 보다 많은 남자와 섹스를 탐닉하겠다는 스포츠인의 의지 정도를 감탄하며 영화를 봤을 뿐이다. 양보다 질이 우선일진대, 영화의 여성은 그저 숫자에 탐닉한다는 점이 이 영화의 유일한 의미심장함이다. 감독이 섹스신을 섹시하게 찍을 생각이 없으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정말 볼품없는 몸부림이 러닝타임을 빼곡하게 채운다.

Nymphomaniac: Vol.1, 2013

<님포매니악>은 조(여자임, 화자)와 샐리그먼(남자임, 청자)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짧게 정리하면 거의 다 조의 섹스 연대기다. 조의 내레이션으로 과거가 제시되고 현재로 돌아오면 샐리그먼은 자신의 방대한 지식을 경유해서 그 과거를 해석한다. 근데 이 해석이라는 것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개연성 없는 독자적 해석인데, 그 순간들이 너무 진지하고 철학적이라 허튼 유머가 피어난다. 한마디로 말해서 피식하는 비웃음인데, 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섹스라는 것 자체가 굳이 분석할 것 없는 욕망의 전시임에도 유의미하게 포장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프로이트까지 들먹이며 정신분석을 한 끝에 결국 조의 사연은 무의미라는 결론을 얻어낸다.(자 이제 너희 둘이 섹스할 거지?)

감독 본인 자체가 물음을 제시하고, 비웃어 버렸으니 이 섹스에 대한 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인간군상에 대한 불쾌한 비웃음만 들으며 영화관을 나온 기분이다. 이것은 어쩌면 영화예술 자체에 대한 조롱이자, 인간 문명에 대한 무용론의 연장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어리둥절하고 내 귀에는 '라스 폰 트리에'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그마 95 선언은 여전히 유효한 거 맞죠?


이제는 악동으로 불리기엔 좀 늙다리 '라스 폰 트리에'

사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이 잉여와 무의미함을 다시 찾아보는 세대이기도 하다. 굳이 특정한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신경 쓸 것 없다는 기조가 젊은 친구들에게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나부터도 그냥 편하게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며 즐기고 살고 싶을 뿐이다. 큰 대의는 머리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인생에서 이리저리 어떤 의미부여를 해봤자 맘대로 되는 게 없다고 말하면 변명이겠지만, 난 내 그릇을 정확히 알고 알뜰하게 소비하고 있다. 님포매니악은 어쩌면 요즘 세상에 빌빌 거리는 젊음에 대한 무성의한 대답이 아닐까.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바라보는 '라스 폰 트리에'의 표정이 생각 나 웃음이 난다. 카페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한 바퀴 돌다 들어왔다. 아 졸라 춥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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