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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6. 2017

텅 빈 집안에서

애프터 루시아 After Lucia, 2012

집을 이사하는 건 막상 할 땐 귀찮지만, 하고 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사실 요즘에야 높은 전세보증금과 방값으로 인해 타의로 이사를 하는 서글픈 일이 잦지만, 이사라는 행위 자체는 내 정신건강에 무척이나 유익한 일이라고 느껴진다. 이유는 삶의 짐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짐을 줄이기 위해 중고나라에 물건을 처분하거나, 폐품 용기에 마구 물건을 내놓게 된다. 내가 쓸모없다고 판단한 물건이 남에게 가서 유용하게 된다는 것은 순환의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를 한 후 단출해진 내 방을 마주하는 일도 반갑다. 내 어깨에 짊어진 짐을 털어낸 기분이랄까.

애프터 루시아Despues de Lucia, After Lucia, 2012

요즘 이런 이사와 짐을 더는 행위의 이로움을 주장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얼마 전 교보문고 실용서 란에는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로 유명한 '곤도 마리에'의 책들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와 <버리면서 채우는 정리의 기적>과 같은 책들은 제목 자체가 왠지 모르게 사기꾼 느낌이 난다. 하지만 조금만 읽다 보면 귀에 솔깃한 메시지가 상당하다. 정리하자면 설레지 않은 옷과 책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삶의 묵은 때를 지우듯 자신의 삶을 정리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과장을 덜어내고 나면 이 책은 정리의 기본을 습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물건과 나의 상호작용 속에 몇몇 과거를 떠올리기도 하고, 이내 그것을 뭉개버리며 미련을 끈을 끊어내기도 한다. 

이사를 통해 새로운 동네에서 터를 잡는 기분도 좋다. 이 동네엔 어떤 커피집이 있고, 걸을만한 산책로는 어딘가 쭉 둘러본다. 직업 특성상 이사가 잦은 난 고된 이사를 끝나고 걸어보는 동네 풍경을 좋아한다. 이번에 받은 관사의 작은 방은 사실 맘에 들지 않았지만, 동네가 여유롭고 공원이 집 앞을 감싸고 있어 저녁 퇴근길에 자전거 타는 기분이 괜찮더라. 


이렇게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부산국제영화제가 떠오른다. 한국에서 가장 근사한 축제인 부산영화제는 영화라는 또 다른 세상의 메타포가 조우하는 멋진 순간이다. 작년에도 난 휴가를 하루 내 KTX를 타고 3박 4일간의 짧은 부산영화제 여행을 했다. 첫날은 영화제에서 예매한 영화가 없어 선선한 부산 남포동을 하릴없이 걸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을 갔다가 남포동을 이리저리 휘젓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나 찾은 곳이 아트씨어터 C+C라는 영화관이었다. 부산의 예술영화관을 습관처럼 찾다가 언덕 위 성당에서 상영관 한 곳을 두고 운영하는 운치 있는 영화관이었다. 딱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난 운 좋게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기억할 영화와 만날 수 있었다.

애프터 루시아Despues de Lucia, After Lucia, 2012
<애프터 루시아>의 배경이 되는 곳은 멕시코시티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아빠 로베르토와 딸 알레한드라는 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난 이사란 언제나 새 출발을 위해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 영화에서 이사는 결국 비극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된다. 왜냐하면 이사 이후 이 부녀에겐 안 좋은 일들만 생겼기 때문이다. 로베르토는 레스토랑 셰프로 일하지만 아내의 죽음에 대한 고통을 쉽게 잊을 수 없어 직장도 그만두게 된다. 이런 아버지를 보며 근심하는 딸 알레한드라는 늘 어두운 표정으로 학교를 다닌다.

낯선 도시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 이 영화에서 루시아의 가족이 겪었던 과거의 사건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 부녀를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천천히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던 루시아는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파티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알레한드라는 호세라는 꽃미남과 우발적인 잠자리를 하게 되고, 이후 섹스 동영상이 유출되면서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엄마의 죽음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변화를 갈망했던 부녀는 비극 앞에 무너짐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떨쳐내고 싶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말없이 응시한다. 특히 집단성폭행 장면과 영화의 마지막 처형 장면이 주는 먹먹함은 견디기 힘들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데, 그 인내란 내 무력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인물과 거리감을 두기 위한 몸부림이다. 특이한 점은 부녀의 슬픔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들이 전개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인물이 겪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다는 점이다. 마치 엄마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가족의 죄책감, 또다시 벌어지는 비극들이 하나의 응당한 대가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이 수치스러운 고요함을 견디기란 쉽지 않다. 두 부녀에게 고통은 삶의 조건처럼 차례차례 강도를 더해가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에야 복수의 속죄가 이루어진다. 재작년 한국영화 <한공주>를 보았을 때 느꼈던 뼈저린 고통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애프터 루시아Despues de Lucia, After Lucia, 2012

사실 내가 이 영화에 감동을 받은 부분은 상흔으로 움푹 파인 소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세간들이 정리된 휑한 집 안의 공기, 사소한 다툼조차 없는 부녀의 소통 방식. 소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외적인 것들은 아픔을 안으로만 삭이는 알레한드라의 내면을 그대로 투영한다. 심지어 아버지가 가해 학생을 향해 응당 해야 할 처형을 가하는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미동도 없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침묵하며 텅 빈 집안에서 자신을 다독이는 알레한드라는 세상이 광폭하게 난도질을 하는 순간에도 고통의 언어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를 본 지 1년이 지난 후에도 이 영화에 대한 내 마음을 정의할 수 있는 언어를 조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나 자신이 가진 결핍한 부분을 막상 영화 속 목격했을 때 울컥해지는 기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참회의 순간들이 날 찾아온다. 그것이 내가 루시아가 앉아있는 텅 빈 집안을 늘 바라보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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