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외롭다고 말하지 않고 외로움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방법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글을 쓴다. 매일 출근하듯 동네 핸드드립 전문점을 찾아 노트북을 편다.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허기지면 샌드위치 따위로 끼니를 때운다. 난 오늘도 오전 내내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카페에 앉고서야 기운을 차렸다. 난 요즘 뭔가를 써내야 한다는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 카페에서 무참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본다. 얼굴을 비비며 나지막이 욕설을 뱉어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공간이다. 난 이런 열광적인 무관심에 마음을 놓는다. 이처럼 작정하고 카페를 본거지로 삼고는 작가가 되겠다는 투정과 불평을 글로 옮긴다.
난 글이 풀리지 않으면 카페 통유리를 응시한다. 창밖은 무구한데 정신은 산란한 꼴이다. 도통 집중을 못 해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간다. 카페는 고독한 사람들의 집결지다. 곳곳에서 저마다 각자의 사정에 열중한 이들이 보인다. 난 몸을 의자에 파묻고 날 선 생각에 젖어들었다. 내 실패를 비웃었던 얼치기들이 댓글이 떠올랐다. 죽이는 걸 하나 써내서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리라. 난 막 우산을 털며 카페 문을 연 미녀를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녀를 기틀 삼아 뭔가를 적어나갔다. 잘 쓰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백스페이스를 연속으로 때리고 있다. 글자가 지워지면 다시 무책임한 공백만 덩그러니 놓인다. 그새를 못 참고 깜빡이는 커서가 내 목을 죄었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문장에서 놓여날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고독은 내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필연적으로 오해를 부르는 존재지만 오해를 상정하고 나면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도 있다. 저 옆자리에 뭔가를 펴고 끙끙거리는 인간들이 연대의 증거다. 옆에 있으면서도 신경 안 쓰는 척하고 관심 없는 척 무심한 표정으로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카페가 여러 고독으로 둘러싸인 고독으로 이뤄진 움막처럼 보인다. 고독끼리의 친근함과 오해의 연대 속에 나의 주말 아침은 흘러갔다. 그 과정에서 샌드위치에 스콘에 커피 두 잔으로 회전초밥집에서나 나갈 돈을 긁었지만 여전히 내 고독은 허기진 노래를 불렀다.
난 슬슬 카페 사장 눈치가 보여서 근처 다른 카페로 옮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거 참 산란하네. 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몇 번을 못 옮길까. 난 새로 옮긴 카페에서 오래전 연인을 떠올렸다. 권태와 흥분, 체념과 극적인 연출 효과를 두루 갖춘 그녀의 인생은 통속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녀의 통속적인 삶을 회고하며 뭔가 써보고 싶어졌다. 나는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던 드라마틱한 낙차를 지닌 그녀의 통속적인 삶의 궤적을 부러워하는 걸까. 나는 늘 참신하고 독창적인 글을 쓰고 싶지만 미끄러졌다. 난 늘 혀를 끌끌 차며 너무 전형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그녀를 못마땅해했지만, 글을 쓸 땐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늘 같은 얘기를 중얼거리면서 같은 아픔을 호소하는 근심 가득한 노인이 된 기분이다. 충동적이며 순수한 의지를 휘감은 그녀를 통해 난 통속의 전희를 맛봤다. 그녀의 존재는 패턴 안에 기생하며 살 수밖에 없는 내 아마추어와 같은 글쓰기가 지닌 운명을 예견하고 있던 셈이다. 모두 각자 의지해야 할 통속이 있다지만, 난 그녀의 굴레를 벗어나야만 비로써 빛을 발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작위와 형식 없이 바로 설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고 하지만, 패턴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 구태의연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
요즘 내 글을 지탱하는 정서적인 핵심은 '열등감'이다. 어려서부터 특출 났던 친구를 지켜봐 오며 느끼는 질투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고 있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소설을 쓸 만큼 예술적으로도 출중했다. 그 지점까지 날 능가하면 난 무력한 걸 넘어서서 외로워진다. 누구보다 잘생겨서 온 동네 여자애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네가 나보다 책까지 더 잘 읽고 말까지 청산유수라니. 난 지독한 노력파도 아닌 데다가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거울을 보면서 여드름이나 짜기 바쁜데, 네가 도서관에서 사는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다고. 나는 몇 걸음 뒤에서 친구를 질시하며 우러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을 녀석에게 인정받기 위한 싸움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녀석이 내가 좋아하던 옆 단지 여자애랑 사귀기 시작하면서 난 녀석을 밀어내고 외톨이가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솔직할 수 없는 감정은 다 글로 적었다. 늦은 밤 귀가해서 방에 혼자 있을 때 혹독한 고독감에 시달렸다.
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책을 읽곤 한다. 여행을 가서도, 카페에서도 심지어 혼자 방에 있을 때도 인정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지적인 허영을 메우려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용을 쓴다. 대문호들의 자서전을 읽고 그들과 비슷한 음식을 먹고 그들의 사고를 흉내 낸다. 남들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이 날 추동한다. 처음에는 친구에 버금가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열망이 계급적인 상승 욕구로 번져나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이야말로 계급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질이라고 했다. 미적 취향은 단순히 돈만으로는 거머쥘 수 없는 계급적 이데올로기의 조건과 같다. 난 늘 열등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탈출구로 작가라는 호칭을 염원했다. 누구나 인정할만한 소양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말을 얹고 싶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고독의 실체를 낱낱이 해부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고전은 타인의 영향 없이 진정한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좇고 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농부들을 보며 사색에 잠긴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려보라. 고독은 인물의 정신과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오롯하다. 고독을 끌어안고 고독에 저항하며 몸을 뒤척일 때 비로소 가뭇해진 감정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외로울 때 스탠드를 켜고 소설책을 편다. 기이한 아늑함과 예측 불가한 폭력성, 쉼 없는 감정 기복이 고스란한 이야기에 빠져들면서 내 고독이 그의 고독과 다르지 않음에 안도한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컴컴한 동네를 밝히는 가로등과 같다. 허기를 지우고 심지어 외로움까지 어느 정도 가져간다. 하지만 한국 문학에 담긴 편의점의 맥락은 고달픔과 빈곤, 막막함을 표상한다. ‘삼각김밥’, ‘컵라면’ 같은 편의점 음식들은 어쩔 수 없이 돈을 아끼기 위해 끼니를 때운다는 인식이 크다. <편의점 사회학>이라는 사회학 책을 쓴 전상인은 말했다. “지금 당장 주위를 돌아봐라. 편의점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면서 비닐봉지 한 개 분 정도의 내일을 준비하는 동료나 친구, 이웃이나 친척이 얼마나 많은지" 나로서는 지극히 편의적으로 사용하는 이 밝은 공간이 그렇게 슬픈 도시의 자화상이라는 것이 와닿지 않는다. 뭘 모르는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으면서 커피도 사고 와인도 사고 김밥도 사니 어두운 게 보일 리 없다. 오직 내 안에서만 말이 맴도니 시선이 바깥으로 향할 리 없다. 오늘의 고독은 붉은 기름이 배어 나오는 김치 불고기 김밥이 다 지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