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랬어야만 했다

by 박민진

그때 다 말했어야만 했다. 요즘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곤 한다. 우선 나이키 운동화부터 떠오른다. 어렸을 적에 새로 산 신발을 당일에 잃어버린 적이 있다. 조회 시간에 늦어서 허둥지둥 교실에 들어섰는데, 쉬는 시간에 보니 교실 뒷문 옆에 있는 신발장에 넣어둔 운동화가 사라진 상태였다. 10분 남짓한 시간이었는데 고새 홀랑 가져가 버린 것이다. 어떤 녀석 짓인지 알만했지만, 난 녀석을 붙들고 닦달할 만한 깡이 없었다. 그저 날 바라보며 웃고 있을 녀석들의 시선을 피해 자리로 돌아왔다. 동네 뉴코아 백화점에서 형이 골라주고 어머니가 큰맘 먹고 결재한 신발을 당일에 잃어버리다니. 영롱한 민트색을 흡수한 나이키 로고가 떠올라서 견디기 어려웠다. 평소에는 어디 붙어 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장기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증오감이랄지, 무력감에 이상한 혐오감까지 뒤섞여서 화를 삭이기 어려웠다. 아마 이런 기분이 암 덩이라는 것이 되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암세포가 우리 할머니를 죽이고, 아파트 위층 아저씨를 걷지 못하게 했으니 난 어서 달아나야 했다. 살짝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이어폰을 꽂았다.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숨 푹 자고 눈을 뜨면 수업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서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태연하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연기할 것이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누구도 내 곤혹스러움을 눈치 못 챌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건 억울하고 나쁜 일이 있어도 타인에게 티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때 선생에게 말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을 내서 목격자라도 찾았으면 아마도 되찾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당시 담임이 잘했던 관심법 쇼라도 했다면 속이라도 좀 풀렸을 것이다. '자 다 책상 위로 올라가서 무릎 꿇고 눈 감아. 열 셀 동안 운동화 훔쳐 간 녀석 안 나오면 밤새도록 그러고 있을 줄 알아.' 이실직고 안 하면 아작 날 거라는 회유와 협박이라도 있었다면 마음이 좀 나았을까.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늘도 삼선 슬리퍼 신고 집에 가게 생겼네. 엄마한텐 뭐라고 하나. 형은 또 날 병신이라고 하겠지.' 따위의 생각이나 했다. 이런 태도는 평생을 이어져 왔다. 예나 지금이나 고립된 채 고민하는 데 익숙하다. 좋은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방식에 길들었다. 한 마디로 방관적인 체하는 병에 걸린 것이다. 쿨한 척 별거 아닌 척하면서 새로 산 내 신발을 신고 시시덕거릴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통받았다. 성큼성큼 다가가서 다짜고짜 때리면서 녀석을 깔아뭉개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시원할까.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최근에도 여러 문제가 터졌지만, 조용히 삭혀내고 있다.


오늘은 커피숍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대화를 나눴다. 동기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그 사람이랑 오래 만났어요?" 난 차창 밖에 있는 차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몇 달 가까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계속 붙어 다녔지." 난 커피를 좀 마시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뚝 끊겨버렸어. 더는 내가 연락하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그쪽에서도 아무 말 없더군.” “이상한 일이네요.” “그냥 그렇게 되기도 하는 거겠지.” “상처받았을 수도 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왜 그렇게 끊겼어요?”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나 봐.” “무슨 연기를 해요? 그냥 연락하기 싫어진 건 아닌가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일지라도 감춰진 문이 열렸던 것에 관해서는 역시 말로 할 수 없었다. 나는 티 없는 진심을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건 글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는 <맥베스>에서 고통을 토로해야 한다는 믿음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던컨 왕의 아들 맬컴은 울부짖듯 이런 말을 한다. "슬픔을 토로하라. 그러지 않으면 슬픔에 겨운 가슴은 미어져 찢어지고 말 테니." 그의 말처럼 정직하게 모두 털어놓을 때 해소되는 바가 있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으니 내내 말하지 못한 걸 카페에 가서 글로 쓴다.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쓰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이런저런 말을 보태서 올린다. 일부러 휘저어서 부옇게 만든다. 아마도 내 글쓰기는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내 안일한 태도를 수용해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사실관계를 뭉뚝하게 다듬어서 받아들이기 좋게 해 놓고는 불쑥 넘겨버린다. 피곤하고 귀찮고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아서 그냥 글로 퉁친다. 나중에 문제가 되어 곤란해지면 깜빡했다고 이마를 두드릴 것이다. 조금만 꼼꼼했다면 굳이 불거지지 않을 문제를 일으켰다는 생각에 자책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우선 숨 좀 틔어야 하니 대충 넘어가자. 수습하는 게 우선이다. 그래서 내 글쓰기는 회피성이 짙다. 가끔은 진짜 중대한 문제에서 안일하게 굴곤 한다. 더 피하고 싶어지니까 글쓰기로는 턱도 없는 도피를 감행한다. 내가 맞부딪쳐야 할 부담을 애써 모른 척하고 수월한 것만 골라 받아들인다. 비겁하지만 살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우겨본다. 그렇게 모른척하다 보면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하니까. 그 모른 척이 망각으로 이어져 그냥 내 삶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치부할 수 있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실체를 모조리 안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걸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종의 괴로움을 거치면서 야금야금 알아갔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적어보는 일뿐이다. 그것이 전혀 상대에게 가닿지 못할지라도 무릅쓰며 쓸 때 누군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때 모두 터놓고 다 말했다면 좋았겠지만, 직면할 수 없는 나로서는 스스로 깊숙이 응시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난 그가 지닌 무언가를 놓쳤을 것이고,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마치 종일 시계를 거꾸로 차고 다니면서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오늘처럼, 쉴 새 없이 카톡방과 인스타그램을 들락거리면서 아무런 일도 진척시키지 못한 오늘처럼 그런 일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친구가 없어서 터놓지 못하는 걸까. 평소에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으니 자꾸 노트북 속으로 파고드는 건 아닌가. 어릴 때야 물론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함께 야구도 하고 수영도 하고. 그런데 어른이 된 뒤로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게 됐다. 특히 일을 시작한 후로는 더 그랬다. 종일 사람들에 시달리다 퇴근하면 고픈 건 상상이었다. 혼자 틀어박혀서 뭔가를 읽고 쓰고 보면서 상상하길 즐겼다. 상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건 도피성 창작으로 이어졌다. 내가 미심쩍은 기분에 시달린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괴상한 글을 썼다. 감상에 빠져서 접영을 치는 우울한 얘기였다. 그때 그랬어야만 했다는 회한의 글이다. 덕지덕지 묻어 자꾸 흘러내리는 우울감을 어쩐단 말인가. 우선 퇴고를 한 번 더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