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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9. 2017

창덕궁을 배회하는 모리

자유의 언덕 HILL OF FREEDOM, 2014

우리 가족은 명절 때마다 차례를 지내고, 파주에 있는 조부모님 산소에 성묘를 간다. 근데 최근 2년간 난 이 성묘에 빠졌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난 집안 막내고, 형과 아버지가 가니 나 정도는 빠져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올해 설날에 큰아버지가 내 불참을 크게 못마땅해 하심을 알아버렸다. 가족 모두가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쓴소리를 하셨다. 사실 웃어넘겨버렸지만, 내심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얼굴 한번 뵌 적이 없다.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하지만 할머니는 유년시절 동안 큰 예쁨을 받았다. 큰 병으로 임종 직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투병을 하셨지만, 난 방황하는 청소년으로서 당연한 듯 장례식이 되어서야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아픈 할머니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후회 때문에 장례식 때 잠깐 울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끄러운 투정이었지 사죄하는 맘은 아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묘 역시 피하고 싶은 순간이 되었다.

난 명절 때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명절의 한적한 서울시내는 머리를 뉘일 수 있는 평온의 공간이다. 빌딩 숲은 사람이 없어 불빛을 잃었고 드문드문 전광판만 욍욍거린다. 종로의 궁궐들은 난데없는 방문객에 놀란 눈치고, 개운한 날씨의 서촌길은 사직단 초입부터 텅 빈 거리를 드러낸다. 텅 빈 광화문 시네큐브 영화관과 그 뒤편 정동길 전광수 커피도 내가 좋아하는 장소다. 덕수궁 돌담길 사람들의 표정은 무료하고, 광화문 교보문고에는 읽지도 않을 책을 사서는 주저앉아버린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그 누구는 광화문 광장 한복판에서 굶느니 투쟁한다느니 나라를 위한다느니 법을 고치겠다고 애쓰고 있다. 난 왜 애써 모른척하고 있을까. 부끄럽게도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질 여유가 없다. 나는 명절이나 되어서야 혼자가 되겠다며, 날 돌아보겠다며 그들을 등한시한다. 올 겨울은 유독 마음이 시큰시큰하다


올해 추석엔 영화 <우리 선희>처럼 홍상수의 <자유의 언덕>을 따라 걸었다. 북촌과 서촌을 배경으로 한

<자유의 언덕>은 영화 촬영 장소가 모두 한 걸음에 밟히는 거리에 있다. 북촌에 위치한 선재 미술관에서 정독 도서관, 창덕궁 빨래터, 자유의 언덕 카페까지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영화의 주인공 '모리'의 발걸음을 추적한다.

일본 남자 모리는 존경하는 여자(그래서 사랑하는 여자) 권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다. 하지만 몸이 아파 치료차 서울을 떠난 권은 서울에 없다. 대신 모리는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위해 편지를 남긴다. 그녀가 사는 북촌에 머물며 보낸 하루하루를 일기처럼 써 내려간 것들이다. 권은 편지를 받은 후 읽으려 한 차에 편지는 뒤죽박죽 뒤섞이고 심지어 한 장은 잃어버린다. 영화는 편지를 받은 권이 한 장씩 읽어 내려가며 진행되고, 그 뒤죽박죽 얽혀버린 시간을 이어 맺으며 시간을 탐색한다.

주인공 모리는 한국에 사랑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왔지만, 막상 오고 나니 다른 여자와 잠을 잔다. 그것도 두 번 잔다. 또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는 한국에서 좋았던 일보다 싫은 기억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자고, 술을 진탕 마시고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선뜻 내어준다. 그는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다니지만, 우리는 그가 겪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점점 더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할 즈음 모리는 그녀와 조우한다. 우리는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한 체 몽롱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떠나게 된다. 과연 난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리를 보았지만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의 언덕은 유독 패배감이 유머를 짓누르는 작품이다. 어둠과 잠 그리고 자조 섞인 목소리들이 그 패배감을 더욱 죽음으로 몰고 가는 기분이 든다. 살아서 뭐하냐는 물음부터 사는 게 점점 더 알 수 없어 낭패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 이유는 앞서 열거한 대로 이율배반적인 세상이 주인공 앞으로 닥쳐올 때 더 이상 난 당당한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보다 통속과 위악이 적은 캐릭터 모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도덕적으로 주인공보다 한 발 앞서서 킥킥거릴 수 없으니, 패배한 자의 마음을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무리하게 요약하자면 <자유의 언덕>은 결국 사랑을 찾기 위한 공간으로 등장하지만, 말만 꺼내면 사랑과 존경을 말하는 이 남자는 사랑을 말하는 순간 이외에는 사랑을 지키지 않는다. 난 그가 두 번째 그녀(문소리)와 잠자리를 한 후 화장실에 갇혀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지금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이 문을 나가 무엇을 해야 내가 옳다고 믿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우리 선희>를 본 후 창경궁은 흥겨운 콧노래가 나오는 여인의 자리였지만, 모리와 함께한 <창덕궁>은 죽은 이의 곡소리가 울려 퍼지는 적막이다.

뒤죽박죽 된 시간과 경과를 알 수 없는 사건들 그리고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감흥들은 결국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소리들이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꿈이라는 단어 역시 이 편지의 일부는 현실과 거리가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결국 우리는 사실과 꿈 그리고 시간의 지배 정도를 추측만 할 뿐 이리저리 끌려다닐 뿐이다. 순간 엇이 중요한지 것인지, 어떤 걸 느끼는지 넘겨짚어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모리가 골목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뒷모습을 보이며 잠을 청하러 가는 장면은 극장을 나온 후 바로 재현된다. 극히 피곤하고 끝내 피로하다.

북촌과 서촌에 비해 창덕궁 주변은 조용하고 걷기 좋다. 조용한 식당도 많고, 궐 내 사람도 적다. 지금 이 명절 한 복판에 이 곳을 오길 잘한 것 같다. 그 누구의 시선 없이 여기저기 걷는 느낌이 완전한 기분을 준다.

* 사진출처 : 영화 자유의 언덕, (주)영화제작 전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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