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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9. 2017

구스 반 산트와 맷 데이먼

프라미스드 랜드 Promised Land, 2012

난 책을 사러 가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퇴근하고 종종 교보문고를 찾는다. 웃긴 건 한 번이라도 더 방문하고 싶어 딱 책 한권만 산다. 교보문고를 나올 때쯤이면 도대체 집어 든 수권의 책 중 어떤 책을 가지고 나갈지 고민을 한다. 물론 그중에선 사고도 다 읽지 못하는 책도 있고, 아 이걸 왜 샀는지 후회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선별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책의 가치는 내게 더 올라간다. 빳빳한 책의 물성과 종이 냄새를 맡으며 책에 애정을 쏟는다. 이제 읽는 일만 남았다. 콧노래를 흥흥거리며 책과 함께 집으로 가는 401번 버스를 탄다.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혼자서 방에 있을 때 주로 소설책을 본다. 잠들기 전, 휴일 아침잠에서 깬 후가 집중적인 독서 시간이다. 정적의 방에서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 보는 경험이란 특별하다. 난 이야기 속 타인의 삶을 읽어낼 때 이해의 과정을 느낀다. 삶의 짐들이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책상 앞에서 독서를 할 때 가벼워진다. 다 읽은 책들이 머리 위로 척척 쌓일 땐 겨우내 취할 양식을 구한 듯 든든하다. 다 읽은 책은 부모님 댁으로 가져가는데, 혼자서 사서 모은 책이 벌써 8층짜리 책장 하나를 다 채워버렸다.(짐짓 살펴보니 다 소설이다.) 감당이 안 되어 삼분의 일 정도는 팔아치웠지만, 막상 더 고르려니 아 이건 또 읽어볼 필요가 있어, 이게 팔아봤자 얼마나 나오겠어하며 도통 솎아낼 수 없다.

가장 난감한 책은 이 책은 읽어줘야 하는데 도통 손이 가지 않는 책들이다. 특히 고전문학이 유독 더 거부감이 드는 것 같다. 세계문학전집 책들은 저렴하고, 가치도 있는 것 같아 막상 사들이지만 제대로 읽은 경우가 거의 없다. 카뮈의 <이방인>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같은 책들은 아무리 다시 집으려고 해도 도통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중학교 때 담임이 세계문학전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걸 숙제로 종종 내줬다. 그 당시 나 같은 순수한 중학생은 곧잘 열심히 해내곤 했다.(당시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미모가 한몫했지) 그때 끙끙대며 읽었던 문학책들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 그대로이다. 그땐 문장 한 줄의 난관을 넘어서기가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읽어내서 고지를 점령하는 패기가 있었다. 당시의 문학을 섭취한 토양이 현재 내가 현대문학을 즐기는 좋은 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유독 장르소설에 침잠해버려 고전문학으로 옮겨갈 여유를 찾지 못하는 지금도 오래된 정원에서 이야기를 창조했던 과거의 대문호들을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예의상 팔아먹을 수가 없다. 근데 당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던 우리 담임은 과연 세계문학전집의 책들 중 몇 권이나 읽었으려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카프카의 책을 읽기나 했을까.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최근에는 중고서적 시장이 활성화되어 책을 저렴하게 구입하고, 보유한 책을 합리적으로 팔 수 있는 시스템이 생겨 책을 처분하기가 쉽다. 읽은 책들을 가져가서 아직 읽지 못한 책으로 바꿔 나올 땐 마치 문화교류라도 한 대사처럼 느껴진다. 마치 가봤던 곳과 작별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화사절단의 일원이 된 기분이다. 두툼하게 쌓여있는 책들을 보면 저 속에 길이 있다며 근거 없이 믿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문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고민하고, 무분별한 개발과 그것으로 인한 기후 변화를 경고하는 텍스트 앞에서 엄숙한 것이 나 아닌가. 하지만 뻔히 세계 환경문제에 대한 이슈를 알면서도 끝내 외면하고, 현실 속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것이 환경에 대한 고민이다. 이는 전적으로 고전문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와 유사하다.


<프라미스드 랜드>는 구스 반 산트의 열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몇몇 작품에서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 깊게 침잠했던 이 섬세한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상업 드라마와 계몽적 메시지가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프라미스드 랜드>에서 내가 느낀 감동은 자연을 지키려는 자세와 의지를 고루하지 않게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선 굵은 드라마에서 이 정도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역학관계를 다룬 적이 있던가 싶었다. 우리가 등한시하고 있던 것들을 여전히 고민하고 생각을 전지 하는 예술가가 있다는 안도감이 영화의 존재 목적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스티브(무려 맷 데이먼)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농업도시 매킨리를 찾는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그의 직업은 개발지의 ‘가스개발회사의 투자 유치’를 성사시키는 중개인이다.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스티브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친다. 대자연의 평지라 한들 돈만 쥐어주면 명분 앞에서도 힘없이 무너지는 수많은 토착민들을 수도 없이 직접 겪어본 스티브는 이 일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만만하게 봤던 임무수행에 예상치 못한 장애가 발생하는데,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인 프랭크와 환경운동가 더스틴이라는 놈이 개발을 반대하면서 주민들의 마음이 돌아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정부와 지역민들의 갈등이 떠올랐다. 환경보호만 외친다고 땅을 헤집던 중장비가 떡하니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당시 밀양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외침이 줄곧 강행되었던 공사 앞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또한 개발을 순전히 악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고민과 주민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프라미스드 랜드>는 왜 환경문제와 개발이 현실 속에 밀접한 고민인지를 한 남자의 현실적인 딜레마를 통해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최근 구스 반 산트의 <굿 윌 헌팅>이 재개봉했다. 굿 윌 헌팅은 최근 열풍이 불었던 멘토라는 소재와 유사성, 고인이 된 로빈 윌리암스에 대한 향수 그리고 무엇보다 멧 데이먼이 있다. 모두 알다시피 멧 데이먼과 구스 반 산트의 인연은 특별한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들엔 유독 사회현안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다. 그리고 멧 데이먼이 환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비밀도 아니다. <밀크>, <엘리펀트>, <아이다호>, <투 다이 포> 같은 작품들만 떠올려 봐도 이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작게나마 유추가 가능하다. <프라미스드 랜드>는 맷 데이먼과 구스 반 산트의 3번째 합작품이다. 난 <프라미스드 랜드>를 보며 환경과 대기업의 횡포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이 영화를 상영할 수많은 학교와 학생들을 떠올린다. 시대가 변해가도 같은 고민과 절대적 가치의 저울질로 드라마를 일구며 사는 사람은 기억된다. 누구나 공감하는 원형의 가치 속에서 그 답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구스 반 산트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시대의 작가다. 그저 환경이 중요하고 고전문학이 훌륭하다는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다시금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 내는 작가는 귀하다. 이 오래된 문제 앞에서 고민 끝에 스티브가 내놓은 대답은 익숙하지만 마음을 울린다. 구스 반 산트는 우리가 다 안다고 손사래 치던 지구 환경에서 다시금 고전의 물성을 얻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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