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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30. 2017

라면의 정서

해무 海霧, 2014

오늘 하늘을 보니 흐리멍덩한 것이 추위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분간이 안 간다. 배고픈 아침이다. 정적의 거실에서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혼자 식당에 가는 건 익숙지 않다. 10년이 넘었는데도 점점 더 불편하다. 혼자 영화 보는 건 즐기는 일이고, 혼자 커피를 마시는 것도 하나의 루틴이다. 혼자 쇼핑, 운동 다 잘 한다. 근데 혼자 식당에서 밥 먹는 건 여전히 신경 쓰인다. 주변의 시선에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다. 그저 혼자 오는 손님을 싫어할 식당이 맘에 걸린다. 고등학교 시절 고깃집 알바를 할 때 혼자 온 손님을 직원들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게 된 후로 이런 눈치를 본다. 요즘엔 점점 더 정갈한 식단에 목을 매게 된다. 어렵게 그런 맛집을 찾으면 손님이 북적거리고 난 밖에서 발걸음을 주춤거린다.

해무 海霧, 2014

오늘도 가끔 찾는 단골 중국집에 갔다. 손님이 늘 북적거리는 우리 집 앞 중국집은 혼자 온 손님을 성가신 듯 쳐다본다. 혼자 와서 4인용 식탁을 차지하고, 자장면 하나 시켜 먹으니 결국 미안해서 오늘은 삼선으로 등급을 높여 먹었다. 늦은 점심엔 혼자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는 든든하지 못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카페에서 때울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이수역 근처의 샌드위치 가게는 야채도 듬뿍 넣어주고 혼자서 먹을 수 있는 노트북용 테이블이 놓여있어 싱글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이런 저렴하고 맛 좋은 식당은 점점 더 찾기 어렵다. 저녁이 되어 길거리를 나와 잠시 산책을 했다.


혼자서 밤거리를 돌아다닌 지가 두 달은 된 것 같다. 내게 식사는 둘 이상의 대화를 동반하는 자리였다. 늘 같이 밥을 먹던 사람이 눈앞에 사라지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혼자서 다 잘하는 나도 고개를 들어 우물대며 모니터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밥을 먹으며 상대의 눈을 담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식사가 이제 없다는 사실이 공허함을 치밀게 한다. 요즘 점점 더 밥이 단출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먹는 게 아니라 때우는 거다. 식사가 아니라 식욕 제거 행위다.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던 정서가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결국 나도 보통날을 맞이하고 있다.

해무 海霧, 2014

오늘 저녁은 라면이다. 끓고 있는 라면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지난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보았던 영화 <해무> 생각이 났다.

한때 여수 바다를 주름잡던 어선 ‘전진호’는 오래되어 감척사업 대상이 된다. 배를 잃을 위기에 몰린 선장은 조선족 밀항 일에 손을 댄다. <해무>는 지난 2001년 있었던 제7태창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국내로 밀입국을 시도하던 조선족과 중국인이 질식사하자, 선원들을 이들을 바다로 던져버린다.

밀항과 살육의 처참한 광경,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해무의 음산한 풍경을 영화는 충실하게 옮겨냈다. 평이 여러 가지로 엇갈리는 것 같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흡입력 있는 작품이었다. 후반부의 선원들의 이성이 마비되는 순간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중에서 가장 큰 아쉬움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혼돈, 인물들 저마다의 어긋난 욕망의 뭉그러져 나온 결과를 매끄럽게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래도 연우 극단의 유명 연극을 영화 각본화 하다 보니 무대 연출을 통해 이룩했던 정서가 대폭 생략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나로선 그저 해무의 차갑고 촉촉한 느낌을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만한 관람이었다. 배우들 연기도 실감 나고, 무엇보다 라면을 먹는 장면들이 좋았다.

해무 海霧, 2014

해무는 본격적으로 밀항이 시작된 이후부터 그 긴장감과 잔혹함에 몸을 떨게 한다. 그럴 때 ‘라면’이 적재적소에 등장해 바닷바람에 얼어버린 영화의 정서를 해동한다. 영화엔 두 가지 라면이 존재한다. 처음엔 허기에 지친 밀항자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컵라면이 등장한다. 이후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 분)과 밀항자 조선족 홍매(한예리)의 호흡을 거칠게 하는 밀회 라면이 극을 정점에 치닫게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은 그들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처럼 이 영화의 또 다른 해무이기도 하다.

홀로 선박에 주저앉아 컵에 코를 박고 컵라면을 먹는 밀항자들 식사 장면은 금세 지나간다. 곧바로 선원들은 밀항자들에게 통보한다. '이 컵라면 용기가 너희들의 더러운 똥, 오줌을 받아내는 변기다.' 컵과 라면을 분리하는 이 실용적인 태도에서 인간의 부박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난 이 장면을 지켜보며 미 영문학자 '테렌스 데 프레'의 유명한 서적 <생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 원제 Survivor>가 생각났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세계대전 중 대량학살이 자행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다. 

테렌스 데 프레, 생존자
“오줌과 똥이 죄수들의 다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밤이 될 무렵이면 팔다리에 얼어붙었던 이것들이 녹으면서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통상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보다도 못한, 두 다리로 움직이는 썩어가는 시체들이었다.”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 생존자 증언)

그들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을 인간다움을 유지하려고 했던 노력이라고 말한다. 식수를 아껴 몸을 씻고, 대변이 범람하지 않게 어떻게든 치우려고 했다. 청결과 위생을 고려 않고 오로지 신체적 생존을 위해 물을 섭취하고 잠을 자는데만 신경을 썼던 사람부터 처형됐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면 귀신같이 알고 나치들은 더러운 수용자부터 죽였다. 또한 인간은 기록, 위생, 대화 등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에서 생존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해무에서 이 컵라면 장면은 밀항자들이 선원들에 반발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들을 인간 이하로 대한다는 것을 깨닫고 분노한다. 밀항자들은 식욕보다 자신들이 가진 인간 존엄을 지키길 원했다.
이후 두 번째 라면이 등장하면서 드라마는 더욱더 팽팽해진다. 동식이 여자 홍매에게 건네 준 컵라면이 그것이다. 홍매가 이 컵라면을 동식에게 먹여줌으로써 비극의 촉매가 된다. 누군가 무언가를 같이 먹는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밀폐된 공간에서 추위를 뒤로 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국물을 마신다는 정서이며, 이마를 맞대고 먹는 행위의 밀접함이 그렇다. '라면 먹고 갈래?'로 유명한 <봄날은 간다>의 대사가 괜히 남녀의 어페어를 의미하는 단어로 상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라면과 섹스를 동시에 취하고, 이후부터 동식은 홍매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그게 비록 살육일지라도.

동식과 홍매가 같이 라면을 먹을 때, 밀항자들이 모두 몰살당한다. 이것은 두 라면의 극적인 대비를 더더욱 강조한다. 이후 선장은 배를 지키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선원들은 배가 침몰하든 말든 서로 각기 다른 이유로 개싸움을 벌인다. 그러고 보니 바닷바람 맞으며 먹는 라면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졌다. 바다를 그렇게 갔으면서도 바닷가 앞에서 왜 라면 먹을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이왕 먹는 김에 배 타고 나가 회도 잡고, 라면에 새우도 넣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라면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다. 문득 여름이 저물어 갈 무렵에 보았던 이 섬뜩한 영화가 라면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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