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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30. 2017

죽음, 단지 세속의 끝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 2013

어제 TV를 보는데 이런 사연이 나오더라. 자신의 여자 친구가 직장생활에 대한 고충을 너무 지나치게 자주해 고민이다. 20대 초반의 그 여자 친구는 이제 막 직장인이 되어 힘들 것이다. 토로할 곳이 남자 친구 밖에 없으니 당연히 의지하게 된다. 다 이해하는데 남자 친구 입장에서는 그 모든 성질을 자신에게 내뿜는 여자 친구가 버겁다. 뭐 흔해빠진 그런 이야기다. 당사자는 속상하고 힘들겠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길만한 보통의 사연. 사연을 계속 들어보자. 남자 친구는 그 짜증의 강도가 너무 심해지니 스트레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밤새 통화하느라 직장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다. 프로그램 패널들은 대부분 여자 친구의 지나침에 대해 한 마디씩 하려는 듯했지만, 선수를 치듯 퉁명스러운 얼굴의 영화평론가 허지웅이 이 여성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해버린다. 자기 역시 직장생활을 해봤기에 출근의 고통, 회의의 지리멸렬함, 상사와의 관계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고. 여성이 아무래도 직장 1년 차이니 먼저 경험을 한 남자가 이해해주는 수밖에 없다고. '싫으면 헤어져야죠.'라고 말하는 허지웅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제는 직장을 가지 않고 글과 방송생활만으로 더 많은 여유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는 탈 직장인의 여유에 내심 시기를 느꼈다.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 2013

나머지 패널들이야 직장 근처에도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니 차치하고, 직장인에서 연예인이 된 허지웅은 이런 사연들에 미소 지을 수 있다. 오래전부터 영화잡지를 봐 온 나는 필름 2.0과 프리미어에 글을 기고하던 허지웅을 알고 있었다. 지하철 출근지옥에서 그의 글을 읽으며 학교를 다녔다. 이제 방송에 더 자주 나오고, 가끔 에세이를 내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장사하는 그의 모습이 세삼스럽게 부러웠다. "혹시 난 남들 은퇴하는 그때까지 출근을 버거워하며 살아야 하는 건가." 개인적으로 사연 속 남자의 고민에 적극 공감한다. 몇 연차이든 직장생활은 누구나 힘든 것이다. 본인이 더 힘들다는 논리로 타인의 직장생활을 등한시한다면 어려워진다. 행복하기 위한 연애인데 마이너스가 된다면 이별이 생각날 수 있다. 그래도 무거운 출근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한 줄기 빛이 연애 아닌가. 행복하지 않은 연애가 과연 성립이나 한 것일까. 어른들의 장래희망, 무너져버린 내 인생의 행로에 유일한 빛, 그것이 연애의 존재 목적이다. 그들 각자의 몫이지만, 내심 내 고민과 같은 동류의 것이라 이 사연을 하루 종일 생각했다.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 2013

그러면 샐러리맨이 되어 좋은 점도 있으려나. 난 긍정적인 놈이니까 좋은 것도 좀 적어놓자. 나 어릴 적 꿈은 저 멀리 달아났지만, 직장인이 되면 알아야 하는 범위가 축소되는 건 좋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만 확신이 생기면, 다른 분야의 지식들은 호기심의 영역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꿈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에 짓눌려 허둥거리던 시간이 지나가고, 퇴근 후 내가 즐길 수 있는 책들을 읽으면 그만이다. 나같이 복잡한 걸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런 심플함은 중요하다. 과거 난 상식 과잉의 상태를 강요받았다. 특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의 일반상식은 수학의 무용함만큼이나 날 괴롭혔다. 지금 불쌍한 입시전쟁, 취업 지옥 속 학생들처럼 말이다. 뭘 그리 알아야 되는 게 많은지 기업들은 수두룩한 스펙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퇴근 후에 영화, 미술, 문학을 물고 빨 수 있는 것은 직장인의 특권이다. 이 정도면 허지웅을 용서할 수 있다.


대학생 때 난 일반상식 책을 자주 읽었다. 출판사가 박문각이라고 했나? 아직도 기억한다. 현재 주요 포탈의 상식사전을 담당하는 출판사다. 왜인지 생각해보니 난 상식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도 재빨리 단기간에 상식적인 놈이 되고팠다. 순진하게도 상식이란 게 한 권의 책으로 정리가 된다고 믿었다. 후딱 빨리 읽고 상식 전투력을 만땅으로 채워놓고 싶었다. 그래야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도 더 많이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책을 읽고,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삶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체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죽는 것임을 이해해 가고 있다. 그런 분명한 세상의 형태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때를 평생 그리워한다. 요즘엔 어른이라는 이유로 요구하는 어쩐지 의뭉스러운 데가 많다. 자고로 사는 게 분명치 않으니 결국 연애라는 판타지에 자기 최면을 거는 거 아니겠는가.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 2013

앞에서 했던 주절주절 쓸 데 없는 푸념들은 영화 <그레이트 뷰티>를 위한 전제前提다. 영화는 로마의 여름에서 시작한다. 높고 푸르른 하늘 아래 황금 태양이 내리쬐고, 인적 드문 거리의 유적지는 고적하다. 이 유적 속에서 신나는 미소를 지닌 이는 관광객뿐이다. 아쿠아 파올라 분수 근처의 로마 전경은 한 폭의 그림이라는 때 묻은 수사마저 넘어서는 위압감이 있다. 기다렸다는 듯 사진을 찍던 관광객이 난데없이 쓰러져 죽어버린다. 그 옆을 지나는 카메라는 개의치 않다는 듯 부감으로 로마를 훑어낸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로마, 그 역사 속에서 사람 하나 죽어봤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느릿느릿한 로마의 여름은 밤이 되자 미친 듯 춤을 추는 파티로 이어진다. 주인공 젭의 65살 생일파티다. 온갖 미모들이 자신을 뽐내는 파티에서 너절한 성욕들은 춤을 춘다. 그 천박한 무리를 옆에 두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우리 젭 할아범.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걸작으로 평가받는 단 한 권의 저자다. 마치 셀린저처럼 책 한 권의 영광에 의지해 평생을 향락 속에서 보내고 있다. 젭은 26살 때 나폴리에서 로마로 상경했다. 그가 로마라는 역사 속으로 진입하여 이룬 꿈은 ‘세속의 왕’이다. 

젭은 육체가 있는 인간이 세속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단맛을 맛보고 싶었다. 그리고 65세의 생일파티를 지켜보며 자신은 그걸 성취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꿈을 이룬 남자 젭은 아침이 되자 허무함에 활기를 잃는다. 젊은 시절의 첫사랑이 그립기도 하고, 이 엄청난 위용의 로마 유적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도 싫다. 이제 아무것도 할 수도, 할 것도 없는 자신은 그저 죽는 순서만 기다리는 송장이다. 어느 날 저녁 술 한 잔 걸친 자리에서 젭의 소설을 폄하하는 여자와 말싸움이 붙는다.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사회의 공명정대를 논하는 그녀에게 젭은 비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신이 그런 말조차 입에 꺼낼 수 없을 만큼 속물임을 인정해버린다.

그레이트 뷰티 The Great Beauty, 2013

젭은 소년 시절 친구들과 웃고 떠들 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노인의 집에서 나는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다른 이가 모두 섹시한 여성을 꼽을 때도 오직 자신만은 꿋꿋했다. 젭은 그 시절 죽음으로 다가가는 냄새가 가장 매혹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없음, 무의 세계, 소멸이 뜻하는 죽음이라는 통로, 이제 그 앞에 선 젭은 과거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있을까. 여성의 육체가 자신이 추구하던 삶의 희락이라면, 죽음은 그 도달점이다. 65세의 젭은 로마를 거닐며 죽음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장고 끝에 얻은 대답이 결국 죽음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은 <그레이트 뷰티>다.

이 영화의 제목대로 그 거대한 아름다움은 결국 죽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에서 어떠한 아름다움을 맛보며 살고 있을까. 이제 연락이 없는 그녀, 오늘 밤 예매한 장르영화, 친구와 함께 구운 삼겹살일 수도 있다. 세속의 끝을 보고 온 남자가 죽음을 기다리며 완벽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심각한 고민들 역시 죽음이라는 귀결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일면 허세로 가득 찬 <그레이트 뷰티>가 내게 속삭이는 의미심장한 결론은 정형화된 틀을 벗어난 것이다. 인생이라는 고무공을 퉁퉁 튀기며 살아보면 다 안다고 거만을 떨고 있는 게 영 보기 싫지만, 그래도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젭의 걸음을 졸졸 따라다니며 산책한다. 젭이 허투루 하는 말들까지 모두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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