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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1. 2017

결국은 기질의 문제

그랜드 센트럴 Grand Central, 2013

자연주의 소설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마치 화장품 브랜드명 같은 자연주의는 인간은 전적으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자연주의(自然主義): 초월적·신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정신현상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현상과 그 변화의 근본 원리가 자연(물질)에 있다고 보는 철학적 체계.(다음 백과사전 발췌)

복잡할 거 없이 인간은 종교적, 영적으로도 자연을 초월한 어떤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 그저 자연이 정한 법칙 안에서 종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자연주의 소설은 인간의 고통을 자연에 귀속된 상태의 인간이 겪는 갈등을 스토리텔링 한다. 자연을 향한 종속, 천박한 욕구, 임상실험과 같은 엄숙한 분위기까지 자연주의 소설은 일정한 패턴을 드러낸다. 자연주의 소설이 등장하기 전 19세기 초 중반 리얼리즘 소설을 발전시켰던 발자크, 디킨스, 조지 엘리엇은 현실 묘사를 극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문학들을 연이어 탄생시켰다. 어쩌면 자연주의는 지나친 현실 묘사에 마음 둘 곳 없었던 문학도들이 찾아낸 나무 그늘 아닐까. 모든 생물의 발생과 변화를 과학적 체계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원숭이의 조상으로 몰아넣으며 완성되었다. 그와 유사한 맥락으로 자연주의 소설은 인간은 한 그루의 나무라고 믿는다. 인간을 둘러싼 물리적인 환경과 그 가운데 단지 ‘존재할’ 뿐인 한 ‘생물체’로서의 인간, 유전적 기질과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그저 물을 먹고 햇빛 아래서 자라난다.

왼쪽은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다.(통속 소설처럼 잘 읽힌다.) 다음은 테레즈 라캥에서 영감을 받은 드가의 '실내', 역시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박쥐>

다음 구절은 자연주의의 창작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의 서문이다.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모랄리스트이자 이상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파리지앵 소설가답지 않은 선언적인 문장이 인상적이다.

소설을 세심하게 읽게 되면, 각각의 장(章)이 생리학의 흥미로운 한 경우에 대한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나는 단 하나의 욕망밖에 없다. 즉 힘센 남자와 욕구불만인 여자를 통해 그들에게서 동물성을 찾아내고, 동물성을 찾아낸 다음엔 그들을 격렬한 드라마 속에 내던져서, 그들의 감각과 행동을 주의 깊게 적어 두는 것이다. 나는 외과의사가 시체에 행하는 분석의 노고를, 다만 살아 있는 두 몸뚱이에 행했을 뿐이다.

영화 <그랜드 센트럴>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자연주의 소설의 '날 것' 냄새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작품이었다. 갸리(타히 라힘)의 피곤한 얼굴로 영화는 시작한다. 열차 안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그가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문제 많은 남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윽한 눈동자와 각진 얼굴 그리고 왜소해 보이면서도 잘 빠진 몸뚱이가 그를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확신하게 만든다. 그가 취업할 곳은 원자력발전소다. 왜 하필이냐고 묻겠지만, 사실 위험한 일일수록 돈을 많이 주니 어쩔 수 없다. 전과가 있는 데다 별 다른 기술도 없는 갸리에겐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며 일자리까지 주는 이 원자력 공단만이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적절해 보인다. 워낙 위험한 곳에 취업한 만큼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진다. 영화가 독특한 점은 갸리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그의 방사능 피폭 수치와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마치 주파를 올려가며 요동치는 파장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런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그가 위안을 얻는 것이 있다면 경력이 오래된 '토니'같은 직장 선배들이다. 자신의 미래로 상정해볼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 하지만 갸리가 토니의 애인 카롤(레아 세이두)과 사랑에 빠지면서 일은 꼬여간다. 

그랜드 센트럴 Grand Central, 2013, 레아 세이두의 육감적인 몸매를 구경하는 재미에 시간 가늘 줄 모른다. 

'갸리'와 같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여인 카롤은 매일 똑같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색도 하얀색이라 가슴이 다 비치고, 얼굴은 또 이상하게 중성적이다. 돈 없는 자신의 처지엔 언감생심 넘볼 수도 없는 치명적 미인이다. 이건 명백한 위험신호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직장선배의 약혼녀라니... 피해야 마땅하다. 매일 그녀와 발전소의 경보음을 들으며 섹스를 하고, 매일 높아져만 가는 방사능 수치는 그를 점점 더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동물 같은 욕망의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갸리는 마치 이끌린 듯 그녀의 음부에 머리를 묻는다. 토니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발전소 주변 수풀에서 몸을 움직인다. 등으로 전해지는 아찔한 통증도, 발전소에서 지속적으로 울리는 원전 유출 경고음도 그들이 내지르는 신음을 막진 못한다. 결국 카롤은 갸리의 아이를 임신한다. 하지만 갸리가 방사능에 몸이 완전히 오염되면서 드라마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재밌는 점은 두 사람의 섹스엔 어떠한 개연도 없다는 것이다. 갸리가 섹시한 남자지만, 힘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더욱이 두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미래 여건도 없다. 사랑이 그런 거라고 말한다면 그런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캬롤의 애인 토니는 씨가 없는(무정자증) 남자라는 설정이다. 결국 갸리가 토니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카롤을 임신시킬 수 있다는 것뿐이다. 이건 섹스와 번식력의 싸움 아닌가. 난 이런 설정에서 자연주의 소설의 질감을 느꼈다.

그랜드 센트럴 Grand Central, 2013, 방사능 유출 위험이 극에 다다를 때 그들은 섹스를 위해 풀숲을 헤쳐 나간다.

그랜드 센트럴의 최대 단점은 그저 기이한 환경에서 발생한 천박한 섹스들의 반복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에밀 졸라는 평소에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길 원한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 말엔 태어날 때부터 쥐어지고 태어나는 감정적 소산이 있다는 말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 몰두하고 섹스에 몰두할 때 그 주위를 둘러싼 녹음을 보라. 이것엔 이유도 없고 그저 기질의 문제로 축약되는 장면 연출이다. 그들은 들풀처럼 그저 몸이 가는 대로 행하는 것뿐이리라. 

영화는 의도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섹스를 나누는 연인과 병치한다. 영화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흥밋거리는 단순하다. 그들의 야한 육체관계를 훔쳐보며, 이상하게 함께 윙윙 울리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신호에 신경을 쓴다.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카롤의 육체가 싱그러운 자연 안에서 꿈틀거릴 때 그 위험의 징조는 더더욱 증가한다. 영화는 윤리적 물음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노동자의 권리와 정부의 집단 이기주의는 화면 바깥에서 겉돌고, 저소득층 가정들을 방관한 체 쳐다만 본다. 도덕적 판단이나 정서적 감응이 제외된 시험관 속의 화학반응을 살펴보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위험신호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무력감일 것이다.

영화는 다소 특이하게도 연인이 정사할 장소를 물색하는 과정을 화면에 담는다. 느릿느릿 천천히 숲을 유영하는 두 사람의 달뜬 표정도 짚어준다. 그녀의 하얀 다리를 붙잡고 몸을 포개는 남자는 이 험한 세상의 유일한 안식을 찾는다. 모든 현실적 여건들이 그녀의 몸뚱이 안으로 뭉개지면서 영화는 끝을 향해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이 순간을 위한 부차적인 것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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