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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1. 2017

말의 욕망, 남근의 언어

뫼비우스 Moebius, 2013

요즘엔 뜸하지만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유튜브에 있는 ‘100분 토론’에 관련된 영상들을 모두 찾아봤다. 탈탈 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침대에만 누우면 눈이 시뻘게질 때까지 즐겼다. 손석희가 사라진 이후의 100분 토론이 전보다 지루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화요일 심야에 몇 사람이 둘러앉아 사회적 현안에 대한 열띤 논쟁을 펼친다. JTBC <뉴스룸>과 <썰전>이 정치와 사회현안을 재밌게 다루는 방식을 보여줬다면, <100분 토론>은 여전히 세상 진지하게 의견을 개진한다.

100분 토론은 하나의 주제로 시작하지만, 종반엔 방사형으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가장 재밌는 지점이기도 하다. 유독 정치인들과 사화단체 임원들이 나왔을 때 이야기가 그렇게 새어나간다. 그렇기에 '밑줄 쫙' 류의 명사들 지식 자랑 코너가 되지 않는다. 이건 주고받는 과정이고, 공격과 수비이며, 역공과 역습이다. 방향의 전환으로 주위를 환기시키고, 느닷없는 감정표출로 공기를 얼린다. 과잉된 감정을 억누르며 상대를 이기기 위해 악다구니하는 모습들이 가득한 논객들의 싸움이다. 100분 토론은 논객의 말솜씨와 발언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쇼맨쉽이 중요시된다. 상대를 반박해 이기는 승부가 내용의 질보다 중요한 승부다. 그래서인지 '진중권' 같은 공격적인 단어를 고를 줄 아는 미친개가 최고의 히트 논객이 되는 곳이 100분 토론이다. 마치 스포츠 중계를 보듯 긴박감이 넘친다. 사회자 역시 이 싸움을 통해 시청률을 올려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기에 다독이기보단 좀 더 자극해서 분위기를 뜨겁게 만든다. 툭툭 자극하는 말을 던져 상대의 흥분을 고조시키고, 옆에 앉은 시민논객은 마치 개싸움 구경이라도 하는 듯 흥미진진하게 몰입한다. 유튜브에는 친절하게도 이런 부딪침의 순간들을 조롱하는 영상들이 '짤'로 편집되어 논객 당사자에겐 '이불 킥' 영상이 될 게 분명한 망신을 준다.

김기덕의 영화 <뫼비우스>를 동대문의 한 극장에서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대사가 없이 조용하게 시작한 영화는 본격적인 절단식(?)이 시작되면서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성기를 자르고 붙이기를 반복하는 이 영화는 성기를 먹기도 하고, 잘라낸 성기 조각을 피투성이 바닥에 등장시켜 내 사타구니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관객이 거의 없는 동대문의 한 극장에서 불쾌함과 초조함(왠지 모르게)이 엄습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다 보고 나왔다. 근래 본 최고의 코믹잔혹극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챈 아내는 남편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분노를 삭일 수 없었던 아내는 결국 남편 대신 자기 방안에서 무구하게 자신의 남근을 자위하던 아들을 거세한다.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애석하게도 복구 불능을 위해 남근을 먹어치운다.

김기덕은 자신이 정복해야 할 고지를 향해 어떠한 고려도 없이 밀어붙인다. 영화의 시작 10분 가히 충격적인 내용 전개인 셈이다. 이후부터는 자르고 붙이고를 반복하는 초라한 남근을 지켜보는 쾌감이 있어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어떠한 은유도 없이 등장한 남근이 이렇게 가차 없이 스크린 안에서 방황하는 영화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옆자리 한 관객은 성적 자극을 위한 자기학대 장면에서 너무 즐겁다는 듯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라스 폰 트리에도 겁을 먹고 도망갈 지경이다.

뫼비우스Moebius, 2013

(성기가 사라져) 주위로부터 놀림감이 된 아들은 좌절한다. 이제 중 2병에 막 걸린 고민 많은 청소년에겐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다. 동기들에게 바지가 벗겨지거나, 욕망하는 여성을 앞에 두고 텅 빈 사타구니를 들이대는 장면은 격한 상실감을 객석으로 전염시킨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의 성기를 절단해서 병원에 보존한다. 언젠가 신경의학이 좀 더 발전하면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이내 성적 욕구를 풀지 못하는 아들은 점점 더 엇나가고, 쾌락을 향할 도구가 없으니 동네 양아치들과 폭력을 행하며 아픔을 희석시킨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정부를 성폭행하고, 관계를 갖는다.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대신해 받은 아들을 구원하고자 성적 쾌감을 줄 수 있는 대체수단을 강구한다. 결국 맨살을 피가 날 정도로 비비다 보면 사정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구글 검색을 하며 각종 논문을 진지하게 읽으며 성기 대신 쾌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하는 조재현의 진지한 얼굴은 가히 일품이다. 영화가 초반 남근을 중심으로 한 난장판이었다면, 이후부터는 맨살을 찢는 고통의 연속이다. 돌로 사포로 몸에 피를 내고 사정을 한 소년의 얼굴을 보라. 욕망을 향한 인간의 집착을 이처럼 처절하게 전시해 낸 작품이 있을까. 하지만 찾아온 평화도 잠시 아들의 남근을 먹고 집을 나갔던 아내가 다시 돌아오면서 비틀거리던 가족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한다.

뫼비우스Moebius, 2013

‘100분 토론’ 얘기를 하다가 영화 뫼비우스가 갑자기 튀어나온 건 ‘말이 모든 것인 쇼’와 말없이 ‘행동으로만 표출되는 영화’가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쇼는 모두 욕망에 대해 사유하고 있음은 분명한데, 욕망은 입구멍과 남근으로 작동된다. 이 리버럴 한 단순함이 두 쇼의 명백한 즐거움이다. 100분 토론은 사회 각 분야 전문가 패널을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가장 원초적인 분노를 자극하여 상대를 이기려 하는 말싸움이 펼쳐진다. 결국엔 어떤 결론을 내지도 못하고,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정이 토론이라는 포장지로 그럴듯하게 미화된다. 그 반면 영화 <뫼비우스>는 어떠한가. 이 영화는 욕망을 실행하는 남근을 직접  절단한다. 주연 배우는 젊은 남근이고, 조연으로 아버지의 남근이 출연하는 그런 영화다. 발기와 절단은 마치 욕망의 on/off 스위치처럼 보인다.

영화의 ‘뫼비우스’라는 제목은 말 그대로 욕망이 대를 이어 표출되고, 어머니와 재회한 아이의 발기를 통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구 펼쳐놓는다. 아버지의 남근을 단 아들의 성기를 욕망하는 엄마와 아내를 뺏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기가 달아놓은 아들의 성기를 다시 자르려는 아버지가 있다. 이 광기는 영화의 주체가 분명히 상기 시키고, 깃털 같은 은유마저 거부하는 영화의 저돌성엔 그 어떤 수사도 무용하다. 말과 남근 어느 쪽이 우리의 욕망을 실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두 가지 싸움판엔 '샤덴 프로이데'의 심리가 작동한다. 샤덴 프로이데(Schadenfreude)는 독일어로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말한다. 상반되는 을 담은 두 독일어 단어 'Schaden' (손실, 고통)과 'Freude' (환희, 기쁨)의 합성어이다. 인간 본연의 시기와 질투보다 더 악하다고 할 수 있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욕망을 설명해주는 말이다. 내가 잘되는 것보다 타인이 해를 입는 것에 더 큰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근원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 두 가지 텍스트에서 그 흥미로운 발현을 지켜볼 수 있다. <100분 토론>의 전개에서 논객이 주장의 관철이 아닌, 타인의 논지를 해치는 것에 목을 매는 것을 위에서 설명한 바 있다. 또한 영화 <뫼비우스>에서 아들의 성기가 잘려나간 후 아버지의 성기를 물려받은 아들이 자기 아내/정부와 동침하려고 하자 다시 베어내려는 심리 역시 마찬가지다. 타인의 성기가 없어졌을 때 욕망의 우위에 설 수 있음이 영화를 지탱하는 '샤덴 프로이데'인 것이다.

뫼비우스Moebius, 2013

내가 김기덕의 영화를 매년 텅 빈 극장에서 기어코 찾아보며 넌더리를 느끼고, 눈에 벌게져서 새벽까지 100분 토론을 즐기는 이유 역시 잘은 모르지만 역시 깨닫는 바는 존재한다. 매일 내가 밟고 살아가는 일률적인 세상에서 쇄말의 한계에 부딪쳐 아등바등 거리긴 쉬운 것이다. 김기덕은 전적인 행동으로 그 한계와 부딪쳐 이겨낸다. 명징한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에 굴복하는 인간 군상을 거침없이 그려낸다. 말 많은 세상, 언어 없이 가해진 고통의 실행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늘 역부족이다. 그 헤아림이 한없이 모자라다. 그래서인지 말은 할수록 구차해진다. 지적 깊이를 천고와 같이 쌓아도 우리가 늘 세상에 힘겨워하는 건 남근(상징적 이미지)을 대체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 때문은 아닐까. 영화 뫼비우스의 텅 빈 사타구니가 어쩐지 슬프게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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