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민진 Feb 04. 2017

부질없는 멘토의 시대

디태치먼트 Detachment, 2011

디태치먼트의 선생님이 인상적이었다. 이건 영화가 좋았다는 의견이나, 주연배우 에드리언 브로디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말과는 좀 다르다. 한 직업에 오랫동안 종사해온 자만이 가지는 무심한 태도가 교사라는 직업과 결합했을 때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의 임시교사 헨리는 도시 곳곳을 떠다니며 교사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늘 대리교사만 하다 보니 아이들에게 큰 애정을 쏟진 않는다. 적절한 거리에서 열의를 지운 체 학생들을 지켜본다. 그는 학생들에게 펼쳐지는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슈퍼맨을 지향하지 않는다. 문제학생이 욕을 하면 교실에서 내보내고,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면 적정한 길을 안내해 줄 뿐이다. 미래가 없다는 말을 섣불리 뱉는 타 교사를 비난하지 않지만, 자기반 아이가 거리에서 매춘을 하고 있으면 거처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아이에게 세상을 이렇게 살라며 종용하지 않는다. 그저 빨리 머물 곳을 구해 떠나라는 것이다. 딱 거기까지가 헨리의 몫이다.

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말을 듣지 않는 요즘 아이들, 누가 요즘 선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나. 열정과 집요함으로 학생을 교화시키기 위해 뛰어드는 선생님은 결코 교사생활을 지속하기 힘들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할 사생활이 있고, 빌어먹을 생계가 있다. 더욱이 헨리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봐야 하며, 과거에 겪은 상흔으로 학생보다 더 골치가 아픈 삶을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헨리는 고달픈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단순히 직업의식으로 학생들을 대할 뿐, 말 그대로 영혼까지 섞어 넣을 순 없다.

영화가 극적인 지점에 이르는 부분도 헨리의 이러한 태도에 기인한다. 헨리는 자신의 일정한 거리감이 교직생활을 지속하는데 올바르다고 판단하지만, 그에게 좀 더 깊은 관심을 요구하는 몇몇 학생들이 그가 거리를 벌리려고 할 때 견디지 못하고 마찰을 일으킨다. 헨리는 거리에서 매춘하던 아이를 거두지만, 그녀가 자신의 집에서 매춘을 벌이자 사회보장기관에 보낸다. 또한 왕따와 비만으로 스트레스받는 친구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녀가 어깨까지 빌리려 하자 상담교사를 추천해줄 뿐이다. 더 이상 거리가 좁혀지면 자신이 견딜 수 없음을 알기에.

난 헨리의 이런 태도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내가 가진 직업을 유지하기 위한 연소의 량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숨을 고르는 과정. 우리는 늘 일을 하면서 고민하지 않는가. 내가 이 직업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쏟아야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족과 친구 그리고 취미생활이 일정한 비율로 내 일상에 섞여줘야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내게 투철한 직업관을 요구할 순 없다. 수년간의 직업을 유지하면서 생긴 권태에 지치지 않기 위한 힘 조절은 본인만의 영역이다. 디태치먼트는 비관적인 결말로 흘러 마음을 먹먹하게 하지만, 뛰놀던 아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게 어찌 비단 선생의 탓일 수 있느냐 묻는다. 이건 교사를 위한 변명도 아니고, 그저 한 직업인으로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보편적인 고민이다.

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사실 난 헨리의 '거리두기'가 통쾌했다. 요즘 말도 안 되게 불어 닥친 멘토에 관한 열풍에 대한 하나의 일갈처럼 보여서. 난데없이 불어닥친 젊은이들의 멘토는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고, 이를 이용한 돈벌이 위주의 출판물과 질 낮은 강연이 눈과 귀를 괴롭혔다. 우리들이 우러러보던 멘토가 이제 기득권의 권력 안으로 편입될 때 우리가 느꼈던 절망감은 말해 무엇하랴. 시스템에 대한 조정이 없는 상태에서, 특정 계층에 대한 처우개선에 무관심한 사회에서 한 개인의 넓은 도량과 영향력에 기대어 대중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시도들에 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디태치먼트의 헨리는 직업인의 윤리라는 것이 무리해서 얻어내는 거짓 감동이 아닌, 할 수 있는 범위의 일과 그것이 아닌 영역을 구분하는 행위임을 말한다.

영화가 가진 헨리와 그 밖의 교사들의 냉정한 직업관은 사회에 묻힌 시스템의 오작동을 드러내게 하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영화를 지켜보면 결국 학생들이 궁지에 몰리게 된 이유는 성과위주의 학교 운영과 부족한 교육예산 그리고 성과 우열 주의에 따른 출신지역 차별에 의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병든 아이들의 일탈과 의욕을 잃어버린 선생이 공생하는 과정이다. 오랜 연륜의 베테랑 교사는 문제 학생들로부터 상처받은 상담교사에게 말한다.

"이 직업의 가장 나쁜 점은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가 여기서 고맙다고 말할게"

애초에 할 필요 없던 일을 요구받는 교사와 그것이 달성되지 못했을 때 쏟아지는 비난이 부당함은 그런 것이다. 애초에 헨리가 추천한 상담기관과 청소년 지도기관이 제 기능을 다했다면 교사에게 쏟아질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는 고민. 한 나라의 대선후보까지 멘토를 찾는 마당에 교사에게 학생들의 미래까지 맡기는 비현실적인 바람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묻는다. 공교육의 죽음은 학교 자체가 아닌 학교를 둘러싼 정부기관의 무능 때문이다. 예수가 아닌 들 어찌 이 황폐한 교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최근 <아자르 선생님>, <클래스>와 같은 영화들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제 훌륭하고 본받을 만한 교사에 대한 고전적 정의는 사라졌다. 학교를 대하는 정부와 학부모의 방향 자체가 틀어져 그들도 인간이라고 적극 변호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얼마 전 죽은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은 어쩌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쓸쓸하게 보여주는 징표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헨리는 사회의 극 빈곤층으로만 이루어진 학생들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에둘러 미래를 미화하진 않는다. 다만 이 사태를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능성 중 문학이라는 세계를 탐독하길 권한다.

 "우리를 방어하고 멍청한 사고방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기만의 자의식과 신념체계를 배양하기 위해 우리 모두 이 기술을 익혀야 해. 우리의 마음을 방어하고 보존하기 위해……."

이 혹독한 세상 내면의 아늑한 세상이라도 마련하여 큰 상처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작은 상처쯤은 쓱 문지르고 넘어갈 수 있는 어른이 되길. 내가 도와줄 수 없으니 너희가 마음속에 작은 보금자리라도 마련하여 안식할 수 있기를.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하는 것보단 이게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 말의 욕망, 남근의 언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