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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04. 2017

'모라토리움'기의 남자들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저

하루키의 소설집을 정신없이 읽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별 상관이 없다. 하루키 문장을 읽기 시작했을 때 느껴지는 설렘은 아직도 나를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빨리 퇴근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퇴근하면서 회사 앞 작은 커피집에 급히 들어가 책을 펼쳤을 때, 커피는 안중에도 없이 이야기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마치 오줌보라도 터지듯 부여잡던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이 쉴 새 없이 머릿속으로 솟구친다. 생각보다 얇고 작은 이야기에 맛보다는 양이 적다는 투정을 부렸지만, 그의 창작열이 아직 식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수확했다. 1년에 한 권쯤은 꼭 책을 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장을 덮었다.     

늘 한결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씨

사실 책의 제목이자 작품의 화자가 ‘여자 없는 남자들’인데, 이 주체야 말로 하루키가 평생을 거쳐 관심을 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늘 규칙적인 삶을 영위하는 하루키적 남자는 그 옷차림만 조금 달리할 뿐 변함이 없다. 어쩌면 하루키의 작품 속 남자들은 하루키 그 자신 한 명뿐일지도 모른다. 조금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하루키의 예술적인 취향을 그대로 일상에 투영한 일상의 흔적은 이제 모두가 하루키의 삶을 추측할 수 있게 하였다. 난 가끔 하루키가 평생 한 권의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건 소설뿐 아니라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 하루키라는 남자의 총체를 알고 나니 더 명확해졌다. 속된 것이 없는 인간이 주는 감동, 단단한 일상을 꾸며주는 장시간의 달리기, 검소한 요리, 재즈와 클래식 넘버들, 레이먼드 챈들러와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애정, 메타포를 통해 꿈꾸는 제2의 세계. 그의 문학은 그의 취향을 표출하는 통로가 아닐까. 진구구장 외야석에서 호를 그리며 날아오는 야구공을 보며 소설가가 되기로 결정했다는 하루키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라는 인간 자체를 문학 장르로 만들었다. 내게 하루키적 삶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가 쓴 소설 속 주인공이 과연 매력적일까. 그 변태적인 성적 취향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여자 없는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주인공들이 하루키의 일상의 톱니바퀴 안에서 탄생된 것이다. 피아노 재즈 넘버를 방안 가득 울려대며 파스타면을 삶고, 동네 공원을 산책하며 기쁨을 느끼는 여유를 포기하지 않는 녀석들이 가득하다. 이 '여자 없이도 잘 사는 남자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밖의 고양이를 구경한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소설이 장르적인 관습 없이도 시종일관 서스펜스 주위를 부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데뷔 초기 영미문학을 따라 하는 B급 소설가로 일본 문단 내부에서 철저한 외면을 당했다. 그의 가치를 알아본 건 하루키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영미 문단이었고, 지금 하루키는 노벨상 수상 작가 후보에 늘 오르내린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내부에서는 그의 문학적 가치가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며 무시하는 기류가 있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서스펜스를 만드는 재료들이 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생활패턴과 문화적 향유의 대상이 포스트모던 이후의 영미문학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그의 문학세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일본이 자랑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스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같은 일본 문학 정통의 ‘페시미즘’의 기류와 ‘사소설’의 영향이 아닌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난 어쩌면 그가 만든 ‘일상의 평온함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하루키적 장르의 실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는 독보적인 하루키의 정서다. 다시 말하면 늦은 저녁 퇴근 후에 혼자서 맞이하는 시간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남자들이 혼자 있는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발산하는 공간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진다. 낡은 책상, 얇은 페이퍼북, 따듯한 커피까지 한결같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하루키적 남성이 자신의 평온한 일상이 깨어질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서스펜스를 발산한다. 다시 일상 안으로 복귀하기 위한 여정은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이 작품집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의 평온한 일상을 파괴할 수 있게 대상화되어있을 뿐,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남자의 곁에서 사라진 여자들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할 뿐, 대체적 삶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남자는 그저 혼자서 있는 삶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스스로 고독을 즐기며 작품의 끝으로 사라진다. 불쌍한 듯, 외로운 듯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하루키적 남자들은 홀로 있을 때에야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

하루키의 작품에서 화자가 자신이 사는 집에 애착을 보이는 건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작품처럼 집의 상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건 처음 보았다. 늘 경제적 문제에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하던 화자들은 이 작품집에선 최소한의 삶의 조건으로 거주공간을 떠올린다. 일본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청년들이 가진 경제문제, 거주지 찾기의 어려움을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아낸 이 문제의식은 눈여겨 볼만하다. 늘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이 남자가 귀를 열고 뭔가를 적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비록 여자가 없지만 남자들의 삶은 여전히 일정 궤도 안에서 패턴이라는 우주를 그려나간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혼자 사는 남자, 혼자 밥을 먹는 싱글, 혼자 가는 여행의 원조는 하루키의 남자들이다. 일본 사회의 독거 열풍이 약 10~20년 전이니 하루키의 문학은 그들의 선택을 그대로 흡수한 셈이다. 하루키가 그린 고뇌하는 청년의 바탕엔 편견 없는 어른을 향한 동경이 있다. 나이를 먹었다 한들 이야기 속의 화자에게 쓸데없는 훈계를 늘어놓지 않는다. 어딘가에 천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고정된 관념에 저항하며 이야기를 헤쳐 나가는 느낌 때문에 하루키의 싱글들은 혼자서 잘 살고 있다.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야기의 잔상은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죽은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남자의 표정과 아내의 외도로 스스로 독립하려는 술집 사장 <기노>의 고풍스러운 가게 풍경이다. 어쩐지 이 남자들에게 있어서 죽어버린(혹은 떠나버린) 여인은 혼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추억거리 일지 모른다. 자동차와 술집이라는 메타포는 내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물리치는 서부의 황야와 같다. 그렇게 혼자 있는 장소에서 떠나간 여자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삶을 위로하는 남자들은 한껏 분위기를 잡는다. 물론 이 남자들 옆에는 술잔과 음악, 문학, 요리가 빠지지 않고 상존한다. 뭐 이 정도면 이겨낼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극복할 것이다. 기능적으로 감정을 자아내기 위해 적재적소의 공간에 배치된 여자들은 자신이 없는 남자들이 이렇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통곡할지도 모르겠다.  

소셜 네트워크The Social Network, 2010

오랜만에 하루키를 읽으며 생각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다 소설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히 하루키의 이야기는 실제 길이의 7할 정도의 길이로 주말을 단축시킨다. 대학 시절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교내 도서관 3층에 사람들이 별로 없는 아늑한 공간에서 하루키의 책 몇 권을 빼서 읽었다. 이후 근로 장학생이라는 저임금에 학생을 착취하는 일자리에 스스로 지원해서 소설과 사랑에 빠졌다. 그때 내 책상에 놓여있던 책이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였다. 지루한 시간마저 금세 앗아가 준 고마운 소설들이다. 이제 날씨가 제법 춥다. 귤을 까먹으며 이불속에서 재밌는 소설 하나 읽기 좋은 계절이다. 하루키 적 남자가 되진 못할지라도 그의 예술적 취향 정도는 너끈히 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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