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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Feb 12. 2017

매일 거짓말을 하는 이유

소설 나를 찾아줘, Gone Girl, 2014, 길리언 플린 저

어른들은 아이에게 가르친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어렸을 적부터 가장 크게 혼이 난 사건은 거의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였다. 치밀하지 못한 거짓말은 곤란한 상황을 불러일으킨다. 섣부르게 선생님을 속이려고 한 나의 거짓말이 그녀의 십자인대를 바짝 서게 만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난 어릴 적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나쁜 건 생각이 짧은 경솔한 거짓말이라고. 오히려 상대를 감쪽같이 속이는 창의적인 거짓말은 칭찬받아 마땅한 것이다. 어른들은 진실을 싫어한다. 잘 포장된 미담만이 웃을 수 있는 대화가 된다. 상대를 기쁘게 속이는 거짓말은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포장하지 않는가. 들키지만 않으면 사려감으로 무장된 사람으로 통용될 수 있다. 춘향이와 신데렐라가 출중한 거짓사연으로 무장하여 자신의 죄를 대중에 용서받아 고전이 되지 않았던가. 불확실한 믿음, 승자의 자기기만, 불투명한 기억이 만들어낸 이 세상의 역사라는 것은 결국 거짓말을 통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은 얼마나 지루한가. 아이들을 혼내려거든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되돌아보라. 우리는 10분 동안에도 수많은 거짓말을 한다. 중요한 것은 남들에게 쉽게 들통 나고야 마는 창의성이 부족한 거짓말의 허점을 아는 것이다. 보다 더 입체적이고 남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그럴싸한 거짓말은 문학적인 삶을 동경해 마지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기의 거장 말론 브랜도는 죽기 전 ‘삶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연기 서적을 출간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죽음 탓에 완성하지 못한 체 세상을 등졌지만, 우리는 그 후일담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브랜도는 이 교본에서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거짓말을 잘하면 연기도 잘할 수 있습니다.’ 문학부터 영화 그리고 희곡, 드라마라는 것이 결국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거짓말 안에서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 합법적 거짓말의 세계엔 치밀함만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고로 훌륭한 예술가는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해내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브랜도의 이론은 노망난 늙은이의 궤변만은 아닐 것이다.

나를 찾아줘의 저자 길리언 플린

여기 거짓말에 대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뉴욕에서 남의 글만 평가하던 신문사 기자 출신의 '길리언 플린'이라는 여자가 쓴 매우 세련된 스릴러 <나를 찾아줘>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부부생활을 거짓말로 점철된 하나의 연극놀이로 바꾸면서 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작품의 목적지는 분명하다. 거짓말이 없는 현실세계의 부부생활은 그저 파탄만을 불러 올뿐이다. 가장 가까운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은 필수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에이미는 글을 쓴다. 편지에 꾹꾹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우리는 소설의 시작부터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가 만든 허구의 세계('어메이징 에이미'라는 아동소설의 실제 모델)의 주인공이었다. 늘 소설 속 에이미와 비교당하며 살아온 그녀는 자신을 거짓의 테두리에 가둔 부모를 증오한다. 물론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에이미는 현실 속 에이미의 은행 잔고를 불려주고, 화려한 뉴욕의 삶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불행으로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과 불일치한 캐릭터에 맞춰진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꾸며대는 삶에 질려버린 그녀는 진실된 삶을 살길 원한다. 이 불행한 에이미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도회적인 에이미의 얼굴과 몸짓에 흠뻑 취해버린 미주리주 출신의 촌뜨기 '닉'이다. 

나를 찾아줘 Gone Girl , 2014

꼴에 또 글 쓰는 기자랍시고 위트 있는 유머를 날리며 에이미 곁으로 다가온다. 뉴욕의 바람둥이로 이름에도 기름기가 흐르는 닉은 화려한 언변을 무기로 에이미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자신과 함께하면 동화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더 이상 부모가 만든 허구의 세계에 묶여 거짓된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이듬해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뉴욕에서 로맨틱한 시간을 보낸다. 에이미는 닉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돈이 없는 닉이지만, 갈라진 턱(뉴요커스러운)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주는 완벽한 남자였다. 그러던 중 닉이 실업자가 되며 경제력이 바닥을 드러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닉의 근사한 저널리스트라는 명함은 사라졌고, 에이미의 든든한 신탁기금은 부모의 파산으로 날아가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닉의 어머니가 암으로 고통받으면서 부부의 잔고는 완전히 바닥난다. 경제적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닉의 고향인 미주리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에이미는 닉에게 완전히 실망해버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둘러싼 환상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지독한 권태를 느낀다. 형체를 드러낸 현실이라는 피로감에 한 침대에 몸을 누이면서도 몸을 섞지 못한다. 서로를 유혹하기 위해 갖다 붙였던 화려한 수식어구는 단답형의 대답으로 스러져 내린다. 언어가 사라진 부부에게 로맨틱한 미래는 위선일 뿐이다. 이제 거짓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현실과의 타협은 더더욱 녹록지 않다그리고 에이미가 실종됐다. 일기장 하나를 남긴 체.

나를 찾아줘 Gone Girl , 2014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테지만, 제목 자체가 스포일러인 이 드라마에서 크게 중요하진 않다. 이건 식스센스가 아니다. 오히려 반전 아닌 반전이 드러난 순간부터, 에이미가 살아서 자신을 다시 드라마의 중심으로 올려놓는 그 순간부터가 영화의 본론이다. 에이미는 거짓말을 통해 남편을 범인으로 몰고 간다.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시골 여자로 만든 실패한 각본가 닉은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져야 할 때다. 젖가슴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제자와 바람을 피우고, 소파에 누워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는 이 뻔한 각본가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대신 총명한 에이미가 다시 각본을 고쳐 쓴다. 치밀한 거짓말(각본)과 세심한 연기력(연출)은 물론이다. 그녀의 일기장은 이제 뉴스에 보도된다. 그녀는 살해의 위협과 간교한 납치극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이고, 이제 자신이 재창조한 지질한 남편은 평생을 반성하며 에이미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것이 결혼생활이라고. 무능한 남편 닉은 생각한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에이미의 뇌 속에는 어떤 것이 박혀있을까. 닉은 에이미의 이야기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린다. 현실세계에서 다시 에이미가 주인공인 이야기 속에 멍청한 악역이 되어버린다.

에이미의 거짓말로 점철된 편지는 치밀한 각본이자, 세상 사람들을 어메이징 한 세계로 초대하는 선의의 거짓말이 되었다. 드라마에 환장하는 대중은 환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말미가 흥미롭다. 에이미의 어메이징 한 거짓말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 된 닉은 다시금 죽어있던 창작욕이 솟아오름을 느끼고 집필에 여념이 없다. 도발적인 거짓말을 통해 자신의 영감을 자극한 에이미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고 있다. 그가 밤늦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미는 알고 있다. 쓰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나는 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그 말들이 결국엔 비루한 닉을 다시금 근사한 남편으로 만들어 줄 재료가 될 것임을.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이 최면의 작업이야말로 두 사람이 결혼생활이라고 부르는 그 지점이 아닐까. 거짓말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부부는 각자의 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낸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다시금 활활 타오른다.

나를 찾아줘 Gone Girl , 2014

지루한 세상에 거짓말은 예술적 영감의 단초가 되어준다. 하지만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가 거짓말을 통해 진실이라는 통로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만성적인 거짓말쟁이들의 악행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자기기만은 사회적 성공을 위한 필수 덕목이다. 신념과 정의라는 고루한 관념이 사람들을 속이지만, 애석하게도 거짓말을 비난할 수 없는 삶이 지속된다. 직장에서의 성공, 더 나은 건강, 더 행복한 관계로 이끌 입체적인 거짓말을 사랑한다. 여기 내가 읽은 멋진 한 구절을 소개하려 한다. 신은 아담과 하와에게 열매를 먹는 바로 그날, 그들이 죽게 될 거라고 말했다. 어쨌든 그들은 열매가 등장한 이상(스토리텔링의 원칙상) 먹어야 마땅했다. 그들이 열매를 먹지 않았으면 이 세상의 우리는 없다. 이 오래된 스토리텔링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신과 인간은 거짓말을 통한 놀이를 통해 탄생한 괴물이라는 것이다. 거짓말 없이는 하루도 버텨낼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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