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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an 27. 2017

글, 은밀하고 소심한 복수

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2016

중학생 즈음, 친하게 지내다가 돈 때문에 멀어진 친구가 있다. 유치하고 단순한 얘기다. 돈을 빌려줬는데 그 친구는 잊었고 난 삐졌다. 그 친구가 일부러 안 준건지 잊은 건지 기억도 안 난다. 그저 난 그 당시에 나름 큰돈을 빌려줬는데, 이후 연락을 피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거다. 그 친구와는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된 후 블로그를 시작했다. 글쓰기에 막 재미를 붙이던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블로그에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이상 쓸 얘기가 없다고 투덜대던 시점부터 내 과거를 끌어들였다.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돈으로 인해 겪었던 갈등을 포스트에 남겼다. 책선(責善)은 붕우지도(朋友之道)라는 맹자의 말을 인용한 글이다.

‘친구 간에 서로 선을 권하고 잘못을 나무라야 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역시 맹자님 말씀이다. 근데 여기에 ‘친구 간에 돈을 융통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추가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가. 친구 간에는 돈을 멀리해야 지당한 것을.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그렇지가 않다. 친구와 만나 커피를 한 잔 하는 순간부터 돈이 든다. 술, 당구, 노래방 쉴 새 없이 카드를 긁어댄다. 돈 없이 친구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예를 드는 과정에서 그 친구와의 ‘빌려준 돈’ 사건을 언급했다. 이름도 가명으로 하고, 이 사건을 아는 것도 당사자뿐이라 별다른 생각 없이 글을 썼다. 꽤나 감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소리들뿐인 조악한 글이었지만 당시 블로거 사이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근데 문제는 이 글의 반응이 괜찮아 당시 싸이월드(그땐 페이스북 부럽지 않았다.) 메인 페이지에 올라가면서부터다. 댓글이 하나 둘 늘어나고, 조회 수가 몇 만이 되자 내 친한 친구들도 하나씩 보게 됐고, 결국 그 친구도 이 글을 읽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왔다. 그 민망한 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 글에 그 친구를 공격하기 위한 의도가 1도 없었다면 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런 전화하기 전에 돈이나 갚아라! 네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내 글을 읽고 찔리지! 내가 글을 쓴 게 잘못이냐!

난 그 친구의 삭제 요구에 그럴 순 없다고 덤덤히 대답했다. 그리고 내용을 대폭 수정할 테니 걱정 말라고 말하곤 급히 전화를 끊었다. 극도의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삭제를 할 수 없었던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고, 오랜만에 화가 나 전화를 건 친구에게 개인적인 인사 하나 남기지 못했던 건 내 밑바닥이었다. 난 세상 찌질하게 글로 친구에게 복수를 한 셈이고, 그 친구로서는 익명으로 처리된 이 사건에서 자신의 내밀한 상처를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여의도 CGV에서 심야영화를 보는데 괴상한 이름의 영화가 개봉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이자 동명의 색안경 브랜드의 사장인 톰 포드(Tom Ford, 1961.8.27~)의 두 번째 영화 연출작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2016)다. 톰 포드는 FADE TO BLACK이라는 영화사의 사장이고, 알다시피 2009년 <싱글 맨(A Single Man)>으로 순조롭게 감독으로 데뷔했다. 콜린 퍼스와 줄리앤 무어 주연이지만, 감독의 인장이 너무 강해 약간 거부감이 드는 영화였다. 훌륭한 예술가는 어느 분야에서든 기본 이상을 할 수 있다는 속설이 톰 포드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나는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을 내심 기다려왔다.

미술관장이자 디렉터인 수잔(에이미 애덤스)은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못 견디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지속되는 불면증에 피부도 푸석하고(과거 장면에서 등장하는 싱그러운 에이미 아담스의 얼굴을 돌려놔라), 호화스러운 집에 살고 있으나 재정 상태는 바닥이다. 섹시한 남편(난 소셜 네트워크의 윙클보스 형제로 기억한다)은 더 섹시한 여자를 바람을 피우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더 이상 예술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괴에 시달리는 수잔은 스스로 속물이라 칭하며 친구에게도 속내를 꺼내놓지 못한다. 어느 날 수잔에게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홀)가 소설 <야행성 동물들>을 보내온다. 수잔은 아내와 딸을 죽이는 과정부터 납치범을 쫓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소설에 흠뻑 취한다. 에드워드와 너무나 닮은 토니를 보며 그녀는 사랑에 빠졌던 과거를 회상한다. 수잔은 소설가 지망생 에드워드를 사랑했지만 불안한 미래에 그를 차 버린다. 그리고는 윙클보스.. 아니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버린다. 이후 그녀는 에드워드를 잊었지만 소설을 다 읽는 중에 과거 에드워드와의 결혼생활을 떠올린다. 과거 능력 없는 소설가였던 에드워드는 이제 수잔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 첫 문장부터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2016

톰 포드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흥미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건축학 전공자이자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예술가답게 영화에서도 그가 만든 공간은 지극히 창의적이고 세련됐다. 수잔의 거대한 집에는 미술작품이 곳곳에 걸려있고, 강렬한 원색의 가구와 채도가 낮은 벽의 대비는 영화에서 미장센이라는 것이 왜 있는지를 증명한다. 흥미로운 건 영화를 끌어가는 동력이 지극히 이야기적이라는 점이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액자식 구조에, ‘현실-소설-과거’라는 3중 구조의 소설이다. 게다가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극 중 주인공이 읽는 소설이다. 극 중 집필된 소설의 배경이 텍사스이기 때문에 톰 포드의 장기인 화려한 미장센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그는 영화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야심을 이야기 구조와 배경을 통해 피력한 셈이다. 도식적으로 보자면 현실의 화려한 삶을 사는 미술관장 수잔은 톰 포드의 자아가 투영된 인물이고, 과거와 소설 속 에드워드(토니)는 문학의 영역으로 대상화된 존재다.



이 영화가 지속적으로 날 자극한 지점은 바로 글(이야기)을 통해 복수하려는 남자의 찌질함이다. 영화는 정확하게 에드워드가 복수의 칼날을 수잔에게 들이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과거와 소설 속‘나약함’을 상징하는 남자 캐릭터의 동일성(에드워드와 소설 속 토니는 1인 2역이다)과 남자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강간 후 살해당한 두 모녀의 시체들은 미술을 전공한 수잔을 지징하듯 상징적으로 전시된다. 수잔의 빨간색 소파는 수잔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지라도, 에드워드의 글이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게 했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그리고 정확히 똑같은 포즈로 수잔의 딸이 그 침대 위에서 낯선 남자와 잠들어 있는 신을 삽입한다. 과거 수잔이 택한 잔혹한 이별통보와 예고 없는 낙태에 대한 감정이 소설을 통해 되살아난 것이다. 이는 자의식을 반영한 예술이 가진 추악함이며,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자기 이야기’를 통해 상대에게 내밀한 복수를 행하고 있을지 상상하게 한다. 아마도 영화 속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수잔의 별명)는 대중에게 다양한 층위로 해석되어 정제된 픽션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와 그녀의 현재를 알고 있는 관객은 에드워드의 찌질함과 나약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마침표로 수잔과 약속한 고급 식당에 뭐가 무서워 인지 나오지 않는 비겁함까지 에드워드의 복수는 비열하며 유아적이다.


녹터널 애니멀스 Nocturnal Animals, 2016

결과적으로 톰 포드는 스타일은 뛰어나지만 서사가 아쉬운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야심은 일면 성공한 듯 보이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조악한 상품이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성 세바스찬, 절묘한 고통>을 비롯한 수많은 미술작품이 작품의 주제의식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재미를 준다. 핏방울로 그려진 복수라는 작품은 노골적이다. 그에 반해 이야기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비유에 그쳐 다소 입체성이 부족하다. 그로 인해 영화는 실오라기 같은 메시지를 남겼지만, 내 일상에 빗금을 치는 영향력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최근 개봉한 레베카 밀러 감독의 <매기스 플랜>에도 재능 없는 찌질한 소설가가 등장한다. 이 영화 역시 소설가(지망생)를 남편으로 둔 여성이 이혼을 택한다.심층적으로 들어가면 공통점을 더 찾을 수 있다. 두 여성은 남편보다 경제력이 뛰어나고, 삶에 냉철한 태도를 가진다. 반면 남편들은 유아적이며 감상적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하며 유악한 남자는 늘 버림받는다. 그녀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상대는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우위에 있다.  마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한 대목을 읽는 것 같다. 진화론적 자연 선택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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