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
식전.
내가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했을 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유레일은 쾌적했지만 열흘 가까이 후비진 호스텔에서 자다 보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출근길 인파 사이에서 거지꼴로 돌아다녔다. 배가 너무 고파서 역 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알록달록한 테이블 색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파스타가 무척 저렴했다. 의자는 더러워 보였지만 푹신했고, 창가 자리는 좀 쉬다 가기에 적당해 보였다. 탱글탱글한 면에 소고기가 잔뜩 들은 라구 소스를 기대했던 내게 다 불어 터지다 못해 식어 빠진 토사물이 나왔다. 하와이안 셔츠에 노란색 반바지를 입은 점원은 날 업신여기듯 짝다리를 짚고 혼잣말을 했다. 아마도 나 같으면 그건 안 먹겠다고 중얼거렸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기운을 내서 현지인 맛집이라도 찾아보는 건데. 식사를 마치고도 여독이 풀리지 않아서 에스프레소를 시켰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딜 가든 커피가 맛있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탐스러운 크레마가 가득 든 도피오가 나왔다. 난 기분이 한결 나아져서 에스프레소 잔에 포커싱을 하고 뒤로는 창밖 풍경이 어슴푸레하게 들어오게끔 사진을 찍었다.
식후.
가방에서 소설책을 꺼냈다. 여행을 위해 챙겨 온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 책이었다. 우연히 유럽 서점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거의 모든 차트에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이 있는 걸 발견하고 샀다. 그 도도하고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마저 페란테 열병을 앓고 있었다. 2,300페이지가 넘는 네 권짜리 세트를 배낭에 넣고 열흘을 걸어 다녔다. 다 읽을 때마다 한 권씩 카페에 두고 나왔다. 책거리치곤 너무 호사스러웠지만, 내심 내가 유럽을 횡단하는 작가라도 된 것 같아서 벅찬 기분을 느끼며 읽었다. 오늘도 책 한 권을 이 허름한 식당에 두고 갈 것이다. 나와 우여곡절을 모두 함께한 소설의 두 주인공 릴라와 레누를 그냥 두고 갈 생각을 하니 무척 속상했지만, 더는 이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여러 차례 에스프레소를 나눠마셨다.
유레일을 끊고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다가 나폴리역에 내린 건 전적으로 소설 때문이었다. 나폴리 빈민 지역 출신인 두 소녀는 1950년부터 대략 60년간 온갖 우여곡절이 난무하는 근현대사를 통과했다. 두 사람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부침은 있었지만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소설은 양도 양이지만 거의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 사건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날 사로잡았다. 나폴리의 작은 마을이 KBS 생생정보통 수준으로 구석구석까지 다 전해지니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구를 누를 수 없었다. 덕분에 혼자 하는 여행이었음에도 릴라 레누와 동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텅 빈 호스텔의 침대 위에서도 두 사람은 말다툼을 벌였고, 관광지를 피해 달아난 낯선 동네의 공원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여행 중에 잠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소설과 겹치며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소설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탈리아인은 진실이 하나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이는 진실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베리타’(verita)가 ‘버전’이라는 뜻을 동시에 함축한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60쪽) 나폴리 4부작이 왜 그렇게 시끄럽고 가슴을 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화로 진실을 가려내는 사람들이다. 진실이 맞부딪치는 걸 겁내지 않고 더 진실에 가까워 보이는 이야기로 승부를 본다. 더 그럴싸하게 말을 지어내는 이야기꾼이 진실의 지위를 쟁취한다. 하나의 일을 제각각 다른 입장으로 제 말이 옳다고 우기기 바쁘니 갈등이 사그라들 리 없다. 그래서 이탈리아인은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에스닉 조크라는 것을 지양하려는 추세지만 왠지 이탈리아인만큼은 그들의 민족성으로 설명해내고 싶은 기분이다. 말로 설명해내고 싶을 지경이다. 호들갑을 떨며 온갖 현란한 손짓으로 대화를 그들의 기질은 친근하고 유쾌하다. 같은 책에서 이탈리아의 한 판사는 진짜 진실은 미확인으로 남을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를 수 있다고 적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무려 나라의 녹을 먹으며 진실을 판가름하는 판사가 한 말이라니. 그건 어쩌면 진위보다는 일어난 일에 어떻게 의미부여 하는가를 가장 이탈리아 사람다운 태도일 것이다. 나폴리 4부작에서도 릴라와 레누를 비롯해서 두 사람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 그리고 어른과 동네 사람들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의 입장을 우기기 바쁘다. 그 열띤 거짓말과 호소력 짙은 주장 사이에서 소설은 바람 잘 날 없지만, 나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쉽게 흥분해서 치미는 분노에 못 이겨서 일을 그르치다가도 토하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흉금을 터놓는 그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는 이런 이탈리아 사람들의 진실을 향한 태도의 부정적인 측면도 짚어낸다. "거짓말은 이탈리아인 사이에서 일종의 능력으로 인정받는다. 이는 영리하다, 교활하다, 약삭빠르다 정도로 해석되는 ‘푸르보’(furbo)와 관련이 있다." 한 정치인은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정치인이 정직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들이 정직하다는 것은 바보라는 뜻이죠. 나는 ‘푸르보’가 이 나라를 다스리길 원합니다”(267쪽) 일상적인 거짓말과 사기 행위가 속출하는 이탈리아는 범죄율이 높고 공공질서가 엉망이기로 악명이 높다. 그건 애칭 '아주리'로 불리는 이탈리아 축구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도 2002년에 경험했고, 대머리 지네딘 지단이 박치기로 증명했던 것처럼 이탈리아 축구는 더럽고 거친 반칙과 시종 트래시 토크로 신경을 건드리는 짓거리로 세계 축구계를 평정했다. 오래전 책이긴 하지만 빌 브라이슨 역시 이탈리아인에 관한 글을 남겼다. "이탈리아인들은 질서란 질서는 모두, 전혀 지키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타면 창문마다 세 가지 언어로 창밖으로 몸을 내밀지 말라는 말이 씌어 있다. 프랑스어와 독어는 '몸을 내밀지 말라'라고 쓰여 있지만, 이탈리아어로는 "몸을 내미는 게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들의 유머와 재치에 감탄하다가도, 방종함을 용인하는 극장의 엔트로피가 우려스럽기도 하다.
산책.
레스토랑을 나와 나폴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실 나폴리는 여행하기 좋은 도시는 아니었다. 낙후된 데다 전체적으로 더럽고 굉음이 들끓었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말은 누가 꺼낸 건지. 도시를 걷는 사람들의 낯빛도 어두웠다. 중심가는 번지르르했지만, 골목 하나만 들어가도 극심한 빈부격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여행보다는 <나폴리 4부작>에 담긴 여러 에피소드를 복기하는 재미가 있었다. 릴라가 웨딩드레스를 맞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 젤라토 가게가 즐비했던 이스키아 항구, 늘 겁을 먹으며 지나쳤던 가리발디 광장까지. 무엇보다 엘레나 페란테를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카페와 서점이 있는 도시라는 점이 끌렸다. 나도 내가 사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런 장대한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까. 도시를 마치 하나의 숨 쉬는 생명체처럼 오장육부까지 다 묘사해낼 수 있을까. 내가 나폴리 시장이라면 엘레나 페란테에게 매년 감사패를 줄 것이다. 왠지 나폴리는 시장도 부패했을 것 같다. 나폴리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3대 미항이라는 말과 함께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도시의 쓰레기 문제와 심각한 범죄율 문제라는 걸 생각해보면 나폴리 4부작의 낙후한 도시 분위기는 여전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행의 막바지 밤이 오자 나폴리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시끄러운 술집들로 소란스러워졌다.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도시 곳곳에서 파티가 열리는 것 같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친구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곳곳의 건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겁 많은 나는 역 근처 가리발디 광장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다음 날 카프리섬에 갈 예정이라 항구 근처에 숙소를 잡아놓은 참이었다. 숙소 근처 주택가를 걷는데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동네 청년들이 파티에 한창이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스무 살도 안 돼 보이는 여자애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환히 웃으면서 내가 맨 배낭을 가리키며 쉬고 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주위엔 비슷한 나이 때의 친구들이 상그리아처럼 붉은빛이 나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자애 옆에는 프렌체스코 토티를 닮은 친구를 날 매섭게 노려봤다) 에라 모르겠다고 하고 들어갔다면 나폴리의 <비포 선라이즈>가 되었을까. 어쩌면 내 눈으로 실존하는 릴라와 레누의 삶을 목격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우선 나는 에단 호크가 아니고 할 줄 아는 이탈리아어가 본 조르노뿐이니 밤엔 잠이나 자는 게 상책이다.
덧붙임.
요즘에 읽은 책,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산책에 관한 에세이다. 그를 따라 파리와 서울을 걸으니 겨울 추위를 정통으로 맞은 요즘 날씨에 산들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박식한 친구를 옆에 둬서 피곤하지만, 그래도 계속 듣다 보면 하는 얘기들이 요사스러운 유머와 꽤 절절한 불평불만이 들어 있어서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을 자학개그로 승화시키는 동료 작가들과의 대화 신이 중간중간 콩트에 가깝게 섞여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인용한 무수한 예술가들은 낯선 이름이 많았지만, 덕분에 한때 파리와 서울에 낭만을 흩뿌리고 다녔던 선배 한량들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웠다. 정지돈이 얘기해주지 않았으면 모르고 살았을 그들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책에서 인용한 수많은 책을 읽어볼 요량이다. 물론 마음만 그렇다. 산책은 그렇게 사람을 들뜨게 하는 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