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들
일찍 잠들었다가 새벽에 깨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니 시간이 몇 신데 이렇게 시끄럽나. 건너편 길가에 불 켜진 술집이 즐비하다. 찬란한 골목마다 웃고 떠드는 치들이 요란하다. 난 먼 세계의 소음처럼 건너편을 멀게만 느낀다. 주렴이 흔들리는 호프집 안엔 왕가위 영화에 나올법한 멋쟁이들이 미소 짓는다. 포마드를 바른 남자와 번쩍거리는 옷을 걸친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선 나와 달리 한껏 빼입은 모습이다. 그들은 나를 구석으로 밀어내 내 존재를 점점 작고 희미하게 만든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볼 때랑 비슷한 기분이다. 심기가 불편해진 나는 그들을 다시 고쳐본다. 어쩐지 남자의 행색이 한껏 불량해 보이고 여자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음침하다. 골목 사이로 네온 불빛이 구슬프게 풍겨온다.
나는 빤히 쳐다본다. 노골적으로 바라본다. 처음에는 관찰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공격성을 띠고 그들을 응시한다. 마치 사진을 찍을 때처럼 피사체를 살피다 특정 순간을 포착한다. 이미지를 박제하듯 시선을 점거한다. 수전 손택은 사진 촬영을 성적인 측면으로 언급하며 총을 쏘는 행위와 비교했다. “카메라를 남자들의 발기된 성기에 비유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은유를 경박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는다(loading)’, 카메라를 들고 ‘겨냥한다(aiming)’, 필름을 ‘박는다(shooting)’라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카메라와 관련된 환상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누군가를 내키는 대로 프레이밍 한 후 이미지를 찍어내는 건 그 속력과 단호함처럼 폭력성을 띤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해를 감내하며 인식을 고정한다.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손에 쥔 채 마구 휘두른다. 나는 관찰자 위치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불변하는 관념을 가진다. 흔들거리는 그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속단한다.
나는 흉포한 눈과 그릇된 인식으로 세상을 본다. 요즘 전보다 많이 삐뚤어져 있음을 느낀다. 조금만 방심하면 불만 어린 생각이 솟구친다. 내 속에 이런 못마땅한 마음이 있다는 걸 믿지 못한다. 특히 예술을 접할 때 쉽게 비관에 빠진다. '요즘 음악은 도통 듣기가 어려울 정도네. 서태지나 이현도 같은 천재도 없잖아. 도대체 요즘 작가들은 깊이가 없어. 다들 먹고살기 어렵다고 엄살뿐이야. 세상을 근심하는 덴 무관심하고 저희 먹고살기 바쁘구먼.' 대체로 이런 식이다. 요는 과거는 빛났으나 지금은 다 시시하다는 태도다. 또 앞으로 나아질 기미가 없다는 투로 말한다. 과거에 난 술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단정하는 사람을 질색했다. 하지만 어느새 비관주의에 동조하는 나를 의식한다. 최근 몇 달간 일이 바빠져 전처럼 책과 영화를 접하지 못했다. 점점 게을러지니 정보가 바닥을 드러내고 글에도 감각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런 걸 세상 탓으로 돌리면 마음은 편해진다. 그냥 살기 바빠서 보고 느끼기가 귀찮은 거지만, 외적인 요인을 욕하면서 다리를 꼴 수 있다. 예술의 황금기라 불리는 1920년대 파리 시민도 벨 에포크를 그리워했다지. 이런 걸 일컬어 황금시대 오류라 칭한다.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는 시간에도 누군가는 곡진한 문장을 읽고 있을 텐데. 내가 결코 접하지 못할 글을 쓰며 골몰하고 있을 텐데. 불안에 휩싸인 나는 기어이 졸린 눈으로 침대맡에서 몇 줄이라도 읽다 잠이 든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비관의 발로다.
"군대의 비극은 섞인다는 것이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대사다. 난 어디든 버무려지지 않으려 시종 대열에서 이탈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고립한다. 그러고 보니 난 일행끼리 가는 여행을 싫어한다. 여행지란 각자의 다름이 유달리 도드라지는 곳이다. 관광지를 몰려다니며 비슷한 걸 보는 꼴을 못 견딘다. 학교에 다닐 때도 끔찍이 싫어했던 게 체육대회, 소풍, 수학여행 같은 집단 행사였다. 그냥 뒷자리 구석 창가에서 엎드린 채 공상에 빠지는 게 좋다. 수업이 시작하면 몰래 소설을 펴고, 쉬는 시간에도 날 건드리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그렇게 낄 데도 빠지고 안 낄 데도 빠지다 보면 팔짱을 끼고 관조하게 된다. 사무용 의자를 한 칸 뒤로 젖히고 누구도 나를 보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전화를 받을 때도 저주파의 배음처럼 조용히 답하고 끊는다. 뭔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면 서둘러 말을 돌리고, 늘 18도를 유지한 채 눈앞에 닥친 일만 냉랭하게 처리한다.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져서 점심시간이 닥쳐도 사람을 피해 되도록 사람이 없는 곳을 배회한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땐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난 기본값이 침울이라 억지 미소를 연습하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침을 싱그럽게 하는 씩씩한 직원 역을 자임했다. 목소리 톤을 높이고, 귀찮아도 동료 인사에 일일이 너스레를 떨며 화답한다. 공동체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날 탐탁지 않게 보는 상관을 애써 모른 척하고 하이퍼리얼 상태를 유지했다. '난 당신을 증오하지만, 결코 노여워하지는 않겠어요. 당신은 내게 그럴만한 힘이 없어요.' 부당한 처사에 굴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리다 퇴근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달리다 사무실을 나오면 속은 문드러졌다. 누군가 다그쳐도 내가 옳다는 식으로 굴었지만, 돌아서면 옳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되뇠다. 그는 날 휘두를 힘이 있었고, 나는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매일 저녁 동기들과 생맥을 때리니 설사만 요란했다. 정신 승리도 낯빛이 어두워지면 그걸로 빛이 바랜다. 세상의 머저리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법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나 같은 범인은 최소한의 자존심을 위해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는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웰라 휠러 월콕스의 '고독' 중) 그 시절 어떤 늙은 남자는 세 치 혀를 잘못 놀려 군만두만 먹었더랬지.
요즘 장강명 작가의 <산 자들>을 읽는다. 시의성 넘치는 소재라 쑥쑥 잘도 읽힌다. 드러나는 메시지와 숨겨진 의도가 고루 잘 묻어나는 소설집이다. 난 주제 의식과 소재가 도드라지면 몰입을 못하는데, 이 책은 모든 작품이 간명하고 산뜻해서 편마다 재밌게 읽었다. 사회적 딜레마에 자기 방식대로 대응하는 취업지망생. 결코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 앞에 선 직장인. 난 누구도 응원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과 교감했다. 난 이 부조리극의 한복판, 어느 곳에 서 있는지 도통 깨닫지 못했다. 화자에 몰입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싸늘하게 조소하는 날 발견한다. 소설을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내 위치를 가늠하느라 자주 멈춰섰다. 지금보다 어리고 민감하던 시절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는데, 아직도 이 문장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난 직장 생활의 권태도 사라졌고, 미움과 악다구니에 치를 떨던 시기도 지나쳤다. 내 고생담을 과거로 치부할 정도로 팔짱 낄 여유도 생겼다. 요즘은 한숨이 나올라치면 커피를 입을 틀어막으며 퇴근을 기다릴 수 있다. 기대치가 적고 뭐든 대수롭지 않아 목메지 않는다.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기분이다. 난 요즘 따라 점점 더 내가 가진 비관주의를 유리한 고지에 선 자의 하품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산 자들>이 뼈아팠던 건 내가 선 위치에 선명하게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난 더는 약자 입장이 아니고, 이제는 죽는소리할 처지가 아니라는 자각. 내 신음이 누군가에겐 속 편한 소리로 들리면 어쩐다. 그렇다면 이제 책장을 덮고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무심한 냉담함이 가시질 않아 쉽사리 다음 문장을 떠올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