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농>
농 : 허구는 사실을 압도하고, 농담은 진실을 제압한다.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에서
최근에 크게 웃은 적이 있었나. 자지러지게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은 기억이 통 없다. 과거엔 텔레비전을 보면서 뒹굴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곤 했는데, 거실로 가면 보이는 게 맥북밖에 없는 현재의 나는 겨우 유튜브나 틀어보며 킥킥거린다. 아무리 웃기다는 밈을 봐도 소리 내서 웃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만나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우스운 농담이 오가도 잘 껴서 웃질 못한다. 금세 지치고 어서 집으로 가서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뭐가 그렇게 조급하고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알 수가 없다. 어른이 되어 웃음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나의 농담 구사력은 상승했을까. 최근에 친구에게 내가 웃기는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유머러스한 사람이냐고 떠봤다. 답을 정해놓고 물어보는 것 같아서 민망했지만 예상한 답이 나와서 안도했다. "물론이지. 너 웃겨." 내가 잘 웃지도 않고 유머도 없는 사람이라면 끔찍했을 것이다. 김소연 시인의 말처럼 사실을 압도해내는 허구를 늘 책가방에 담고 다니는 내가 진실을 제압해내는 농담에 인색하다면 완전 재수 없었을 것 같다. "근데 너 혹시 거짓말은 아니지? 내가 어디가 웃기는지 한번 말 좀 해줘 봐." 의심은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줘도 웃음기를 사라지게 하는 병이다.
최근에 김찬호 교수의 <유머니즘>이라는 책을 읽고서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쳤다. "유머는 대화에서 양념처럼 첨가되는 조미료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인간성을 이해하고 실현하는 바탕이 된다. 너와 나 사이에 유머가 작동하는가. 그것은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지표다." 최근에 매주 만나서 쉴 새 없이 농담을 주고받던 사람들과 한순간에 멀어졌다. 그건 어느 친구의 말처럼 진지한 속 얘기를 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농담 따먹기를 하는 관계는 얄팍함을 피할 수 없는 걸까. 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물론 지금도 농담과 얄팍함이 인과로 묶인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다. 다만, 유머가 작동하는 사이에 인간성이 담기지 않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위험을 완전히 모르지는 않았다. 별 표현 없이도 유머가 번져가는 와중에 관계는 절로 돈독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애정 표현에 인색한 나는 아무래도 유머 그 이상을 차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자책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변덕에 나를 맞춰내길 포기한 이상 유머 이상을 우정에 투여할 여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은 책이나 읽고 자투리 시간이 남으면 잠이나 더 자고 틈틈이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둔 음악을 들으며 연인과 공원을 걷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아직도 뭔가를 기대하고 함께해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다. 앞으로도 꽤 긴 시간 호탕한 웃음이 오가는 맑은 관계가 지속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 전에도 난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은 멀어지게 될 관계라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되새기는 건, 내 취향을 가다듬고 비슷한 취향을 지닌 이들과 정겨운 얘기를 나누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드는 글을 써내는 일이 내겐 거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요즘 모든 게 명료하게 정리되어감을 느낀다.
보통 남자는 유머를 하는 것을 편해하고, 웃음에는 인색하다고 한다. 반면에 여자는 보편적으로 웃기는 데는 젬병이고 잘 웃어주고 공감해주는데 더 큰 능력을 갖췄다고 한다. 뭐 다 속설이지만 어째 딱 맞는 말처럼 들린다. 속설 어쩌고 해도 나라는 놈도 평소에도 웃음에 인색하다가도 기회만 생기면 농담 칠 궁리를 한다. 그래서인지 나보다 뛰어난 유머 전문가가 동석하면 초조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내가 더 기발하게 웃길 수 있는데, 쭈뼛쭈뼛. 소심하게 툭 던지고 아무도 안 웃으면 집에 갈 궁리만 한다. 더 잘 듣고 더 크게 화답하고 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웃기는 사람이라고 싶다는 열망이 내 표정을 굳게끔 한다. 그래서 보통 생각나는 유머가 있으면 무조건 뱉고 본다. 머리를 굴리며 틈을 보다가는 타이밍을 놓치고 만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커도 민망한 유머를 잘도 섞어낸다. 어떨 때는 내가 한 유머를 아무도 유머인지 몰라서 당황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자존심상 내가 먼저 웃지는 않는다. 마치 난 유머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미간에 힘을 더 주고 버틴다. 유머가 미끄러져서 뜨악한 분위기를 자아내도 더 뻔뻔하게 군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가득 낀 봉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배짱을 부린다. 아무리 실패해도 한 번만 제대로 들면 되는 거 아닌가.
난 어릴 적에 동심이 있었을까. 천진난만한 기운으로 주위 사람들을 기분 좋게 했을까.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크게 웃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우울한 아이였다. 내가 나를 긍정하고 삶을 낙관적으로 본 건 다 크고 나서였다, 정확하게는 돈을 벌고 운동을 집중적으로 시작하고 독서를 오직 하나뿐인 취미로 만든 순간부터였다. 그래서 난 오히려 서른이 넘어서 유머 감각이라는 것을 회복한 것 같다. 나를 긍정할 수 있을 때 유머를 뱉을 배짱이 생겼다. 아이다움과 멀어졌을 때야 유머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졌다. 비루한 내 과거를 떨치는 의미에서 유머는 꽤 그럴듯한 로그라인이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유머러스한 삼십 대 남성.
어릴 적에 품었던 파괴적인 공격성이 어른이 되어서는 유머의 비틀린 기운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유머는 아무리 잘 다뤄도 누군가를 벨 수밖에 없으니까. 심지어 자기 비하 개그도 까딱 잘못하면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미묘한 비꼼과 미세한 조롱 그리고 약간의 비하와 소량의 풍자가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활짝 웃다가도 끝에 살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볼 수 있다. 어쩔 때는 다 늦게 잠이 들 무렵에 유머의 속뜻을 한 번 더 생각하게끔 한다. 아무리 사려하고 조심해도 날카로운 모멸감을 막을 도리가 없다. 난 그걸 페이소스라 부르길 좋아하지만 과연 내 유머를 듣는 이가 항상 유쾌한 기분일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요즘 난 보통 나를 소재로 가지고 논다. 나를 우습게 하면서 최대한 가시를 숨긴다. 물론 너무 기막힌 놀림거리가 생기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그래서 <유머니즘>에서 김찬호 작가는 웃음에 관해 "전투에서 패배한 상대편이 상처를 입고 부상당한 모습을 보면서 느낀 쾌감"이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역시 유머가 내겐 최고의 미덕이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매혹이다. 매사 진중하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유머가 없으면 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시종 가벼워 보이고 사람이 덜렁거려도 해학을 탑재하면 그 자체로 매력을 느낀다. 그건 마치 노래방에서 아무리 소몰이를 해대도 귀가 안 열리는 사람과 같다. 음정이 다 나가고 삑사리를 내도 듣기 좋은 사람은 유머를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책을 꽤 많이 읽는 나는 매해 유머 능력이 향상돼가고 있을까. 독서는 유머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을까. 혹자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유쾌한 긴장을 즐기게 하고 대화의 멋을 빚어낸다고 하던데, 사실 그건 먹물들의 대화에서도 통용되는 말 아닌가. 원초적인 웃음은 유튜브에서 탁재훈을 보며 배워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책을 멀리할 것도 아니면서 난 되지도 않는 기대를 하고 있다.
난 웃는 얼굴에 늘 고프다. 오늘도 회의 시간에서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는 명목으로 말장난했다. 아재 개그라는 비난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개드립을 쳤다. 물론 분위기는 얼마 못 가 예상처럼 삭막해졌다. 그런 개그 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부장님의 표정은 엄숙했다. 그래도 난 계속할 거다. 골도 못 넣고 풀타임을 뛰어다니는 박지성처럼 쉼 없이 허튼소리를 뱉을 생각이다. 어릴 땐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이 가진 미덕이 좋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무리 뻐꾸기를 날려도 술자리에서 여성과 사라지는 건 고개를 푹 숙인 사람이라는 속설도 더는 믿지 않는다. 이상형도 과거와 달라졌다. 과거에는 말 없고 사연 있어 보이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좋았다. 하지만 나이를 좀 더 먹어보니 내 썩은 개그에도 활짝 웃는 여자가 좋다. 말은 할수록 실이 많고, 말실수는 연이어 나를 당혹게 하지만 그래도 내 얘기에 잘 웃어주는 사람 곁에 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