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정신으로 쓴 글은 시시해

소재 <술>

by 박민진

레이먼드 카버,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캇 피츠제럴드, 존 치버의 공통점은 뭘까. 지독하게 술을 좋아했던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냐면 문장마다 술 냄새가 풀풀 난다. 이들은 흔히 위대한 작품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우길 때 거론한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인 작가 여섯 명 중 네 명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게 이 말을 증명한다. 몽롱하게 취한 상태가 창작에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환상은 홍상수의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의 에탄올 소설은 실제 그들의 삶을 망가뜨렸고, 재정 상태를 파탄 냈으며 평생 따라다닐 사고를 쳐서 위키피디아에 여담 코너를 아기자기하게 꾸몄다. 어디 그뿐인가. 과음으로 친구를 잃고, 건강이 악화됐으며, 결혼은 파탄 났고, 아이를 학대한 혐의로 잡혀갔으며 직장에서 해고됐다. 과음과 파국은 일맥상통하니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파국과 소설 사이에도 샛강이 흐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비극의 레퍼토리를 앞에 내세우고 고꾸라지는 캐릭터를 양산했다.


난 술을 마시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작가를 생각하며 소설을 읽는다. 그들이 그린 비극은 덩달아 나까지 취하게 만든다. 가령,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에는 밤만 되면 술을 마시는 인간형이 자꾸만 일을 그르친다. 어처구니없게 인생이 뒤바뀐다. 술 마시느라 오직 한 사람을 놓친다. 하지만 어째겠는가 취했는데. 난, 마치 주취감형을 일삼는 판사처럼 만취한 그들을 감싼다. 조이스 캐롤 오츠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평생 공무원처럼 건실하게 써낸 작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술병이 나뒹구는 작업실에서 냄새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대충 닦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그들이 눈에 선하다. 위태로운 생계와 밀린 양육비를 탕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화통을 붙잡고 출판사와 실랑이를 하는 모습. 핏대 핏대 오른 눈과 벌건 코, 그 아래 노기를 품은 듯한 덥수룩한 입매. 남은 술이 없나 냉장고를 뒤적거리는 다급한 손. 술 없이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뻔한 속삭임.


난 술 취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 덩달아 술을 마시고 싶다. 소주와 찌개를 소반에 차려놓고 거나하게 취하고 싶다. 술 냄새가 밴 문장을 쓰고 싶다. 속된 삶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취하지 못하는 것이 콤플렉스다. 단조롭다 못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하루가 쌓여나가니 초조해진다. 난 뭘 모르는 게 아닐까. 그들이 취한 눈으로 보는 세상을 나만 모르고 사는 건 아닐까. 허튼 생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난 정말로 자문한다. 피츠제럴드도 생전에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 “술을 마시면 감정이 고양되고 나는 그런 감정을 이야기로 담아내지. 맨 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 그건 감정 없이 이성으로만 쓴 글이니까.” 헬스장이나 들락거리는 박 아무개는 정말 이성으로만 글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 일류 작가들은 밤의 밑바닥에 떨어진 회한을 안주 삼아 잔에 술을 채우는 속도를 높여가는데, 난 고작 카페에 앉아 눈알을 굴리면서 스펙터클을 상상한다. 술 한 잔만 들어가도 점심때 먹은 밥이 자동으로 똠양꿍이 나로서는 뭔가 손해 본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어릴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자리에 끼는 걸 좋아했다. 목소리가 커지고 자꾸만 킬킬거리는 이들 사이에 앉아서 관찰하는 게 재밌었다. 뻔한 얘기와 비틀린 웃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리저리 치우치는 사람들의 가엾은 모습에서 삶의 비밀을 발견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내 앞에서 웃고 떠들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디 가긴 어디가. 다 결혼하고 일에 바쁘고 먹고사느라 자연스럽게 멀어졌지. 친구들은 내가 술을 안 먹는다고 통박을 주곤 했는데 그런데도 술자리가 생기면 꼬박꼬박 날 불러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강냉이인지 뻥튀기인지 모를 과자만 먹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난 취중에 기적처럼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을 오길 기다렸다. 새벽, 네 시쯤 되면 갈 놈들은 다 가고 진짜 액기스 같은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속에 없는 악담을 퍼붓기도 했지만 한 잔 두 잔 비워지는 술잔이 오가다 보면 진실에 가닿는 말이 오갔다. 전부터 의식하고 있었으나 말하기는 남사스럽고 쑥스러워서 지나쳤던 감정을 못 이긴 척 꺼내놓는 곳 또한 새벽녘의 술판이었다. 술에 망각이라는 효능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망각을 믿고 꺼내놓았던 얘기들을 난 글로 자주 썼다. 술자리가 파장으로 치달을 때까지 먹태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뇌리에 박아둔 얘기가 많았다. 다들 우르르 일어나 집으로 가버려도 끝까지 버티면서 묻고 답했던 어떤 알맹이의 그것. 결국은 무의미하게 꼬라 박히던 진심. 어쩌면 도돌이표에 불과한 그 허풍까지도 난 좋아했다. 후회, 회한, 치기, 원망과 같이 매캐한 감정을 적어서 보곤 했다. 5촉 백열등처럼 은은한 연민을 담아 썼다. 빈 술잔을 채워주고 등을 두드려주며 고된 하루를 이고 왔을 그들의 등허리에 고운 말을 얹어놓았다. 외로운 사람에게 술이라도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술은 인간을 귀엽게 하긴 한다. 코너에 몰린 인간에게도 술을 마실 때만큼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희망 없는 상황에서도 유머를 던지는 사람은 취한 이들뿐이라는 걸 그땐 잘 몰랐다. 특히, 마시던 술이 다 떨어져서 편의점에 안주를 사러 갈 때 신이 났다. 눈 쌓인 거리와 술집 간판이 자아내는 따스한 기운은 겨울의 환상이었다. 존 치버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음주벽과 글쓰기는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이 주는 흥분과 상상이 주는 흥분은 아주 흡사한 면이 있다.”


우리 가족도 나 빼고는 다들 술을 즐겼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술을 많이 드셨다. 주사도 심해서 집에 와서 뭔가를 던질 때도 있었다. 무선 전화기는 고치면 부서지고 고치면 또 박살이 났다. 형은 중학생 때부터 동네 공원에서 소주를 마셨다. 행인에게 행패를 부려서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가기도 했다. 엄마도 알게 모르게 얼굴이 벌게서 들어올 때가 많았다. 동창회네 산악회네 하며 바삐 돌아다니면서 술을 즐겼다. 나만 못 즐겼다. 집이 한창 흔들릴 때도 그들은 술로 버텨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 널브러진 술병과 함께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나락으로 빠져들지 모르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우리 집은 겉보기에는 중산층의 전형으로 비쳤지만 술만 마시면 썩은 환부가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후회와 분노가 삐죽거리는 게 눈에 다 보였다. 서로를 원망하고 어떨 때는 저주하는 게 다 보였다. 그럴 때마다 꼴 보기 싫어서 방문을 잠그고 컴퓨터를 켰다. 소란을 피해 꽝꽝거리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게임을 했다. 난 일류 사냥꾼이었다. 목검으로 사슴도 잡고 토끼도 잡고 검술 훈련도 했다. 그렇게 사냥을 하고 있으면, 그래도 술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도 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에코 스프링(Echo Spring)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려고요.” 에코 스프링은 버번위스키 브랜드명에서 따온 단어로 작은 술 진열장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상징적인 표현으로도 쓰인다. 술을 마시며 잠시나마 골치 아픈 생각을 잊고 고요하면서도 몽롱한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들은 치열한 ‘창작의 고통’ 속에서 술을 통해 에코 스프링과 같은 작은 위안을 얻은 것이다.


나도 더 크면 술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제나 이제나 술이 당기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막연하게 지금 나이쯤이면 친구들을 불러내서 한 잔 하는 게 취미가 될 거라고 믿었다. 내게 술은 인생의 꿈이 가망이 없는 꿈으로 추락했을 때를 위해 남겨둔 보루로 보였다. 근데 서른 후반에 다다른 현재의 난 술은커녕 이제 술자리에도 잘 가지 않는다. 친구가 없기도 하지만 술자리에서 꺼낸 얘기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와인을 마셔라, 시를 마셔라, 순수를 마셔라”라고 외쳤다는데, 난 와인을 마시면 시는커녕 잠들기 바쁜 '알쓰'다. 순수를 외치기에는 명료한 정신으로 쓴 글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독서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여행할 때 술을 마시긴 했다. 장기 여행이라 낮에 거리를 쏘다니다가 저녁마다 위스키 바에 가서 음악을 들으면서 홀짝거렸다. 말도 못 하게 독하고 썼다. 무슨 맛인지 알 리 없었다. 그냥 밤에 갈 데가 없었다. 난 바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구경하길 즐겼다. 피아노 재즈 넘버가 방 안 가득 울려대며 옆에서는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주방에서는 감자를 튀긴다.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내일을 사는 이들은 여행자인 나와는 다르게 술을 빠른 속도로 마셔댔다. 퇴근 후에 혼자 위스키 한잔을 걸치기 위해 종일 일해왔을 터였다.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의 말을 엿듣고 주크박스가 돌아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놀았다. 하루키가 쓴 위스키에 관한 책도 읽었다. 내가 앉은자리 맞은편 바에는 술을 마시면서 독서하는 남자가 보였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검은 옷에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그 옆에서 바텐더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술을 마시는 인간 군상을 바라보면서 점차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달콤한 위스키 그리고 머리를 긁는 고양이, 프란츠 리스트의 현란한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는 술집이야말로 완전한 세계라고 여겼다. 술을 더 못 마시는 게 애석할 뿐이었다.


술에 관한 소회를 잔뜩 적고 나니 정말 술이 당긴다. 그래 봤자 마실 리 없지만 군침이 돌긴 한다. 술을 받아만 놓고 알탕과 닭발, 오돌뼈를 먹고 싶다. 은은한 불빛 아래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쯤 되면 술에 취해 쓰는 작가든, 술에 관한 에세이든, 술술 넘어가는 소설이든 뭐든 읽어야 할 터다.



참고 서적 : 작가와 술, 올리비아 랭 저

커버 사진 :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